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차옥(次玉). 한성부판윤 최천유(崔天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점(崔痁)이고, 아버지는 이조정랑(吏曺正郞) 최명손(崔命孫)이며, 어머니는 조찬(趙瓚)의 딸이다. 장인은 김영견(金永堅)이다.
1476년(성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이듬해 경연전경(經筵典經)이 되고, 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예조좌랑(禮曺佐郞)·예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0년 사간원수사간(司諫院守司諫)에 승직하고, 침묵하고 언사를 개진하지 않는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나 곧 복직되었다.
연산군 초에 당상관에 오르고, 1497년(연산군 3)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후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황해도관찰사·예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02년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되고, 이어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를 폐비할 때에 사관에 재직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과 함께 복직되고, 1510년(중종 5) 종2품계에 오르면서 예조참판에 발탁되었으며, 대사헌을 역임하고 퇴직하였다가 병으로 졸하였다.
학문이 정심(精深: 깊고 주도면밀함.)하지는 못하나 박실(朴實)한 성품과 근근(勤謹: 조심스럽고 근면함.)한 직무로 상하의 인망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