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승(季昇), 호는 인재(訒齋). 최이회(崔以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치운(崔致雲)이고, 아버지는 최심(崔深)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정희좌(鄭熙佐)의 딸이다.
고응척(高應陟)·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도처에서 공을 세웠고, 1598년 그 공으로 원릉참봉(元陵參奉)이 되었다.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8년 예문관대교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진상용 『대학연의(大學衍義)』,『소대전칙(昭代典則)』을 가져 왔고, 1612년(광해군 4) 실록청 겸 춘추관에 들어가 『선조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예부종사관을 거쳐 형조참의 · 부제학 ·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렀다. 1627년 횡성사람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투옥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곧 석방되었다.
숙종 때 선산의 송산서원(松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인재집』이 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간(定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