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적(子迪), 호는 유하(柳下).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부사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는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아우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형 최명진과 더불어 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되려 했으나, 한 집안에 여럿을 공신으로 할 수 없다 하여 책거(冊去)되고 공조좌랑에 특제되었다. 그 뒤 세자익위사 익찬(翊贊)이 되어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어 이유도(李有道)를 탄핵했다가 송화현감으로 나갔다. 곧 돌아와 이조좌랑·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사간·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635년 승지가 되었고, 1638년 병조참의·대사간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서 1641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왕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있다가 용골대(龍骨大)의 청병(淸兵)과 동행, 귀국하였다.
1644년 동지 겸 세폐사(冬至兼歲幣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1648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도승지가 되어 측근에서 왕을 보살폈다. 1650년(효종 1) 경기도관찰사·이조참판을 거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이조참판 때 전형(銓衡)에 실정(失政)이 많았음을 이유로 간원(諫院)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53년 영해부사로 복직되어 곧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1655년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 때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는 처참한 상황을 보고하고 해서연변(海西沿邊) 열읍(列邑)의 창곡(倉穀) 300∼400석을 옮겨 쓰게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에 협조해줄 것을 상소, 왕의 윤허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