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언시(彦施). 공조판서 최선문(崔善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한후(崔漢侯)이고, 아버지는 최세청(崔世淸)이며, 어머니는 권장손(權長孫)의 딸이다.
생원시에 합격한 뒤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18년(중종 13)에는 경상도 김산(金山)에 살면서 왕에게 상소하여, 재변(災變)의 경계를 말하며 조정의 화합을 건의하였다. 왕이 그의 비범함을 칭찬하였다.
과거급제 이후 홍문관의 정자(正子)·저작(著作)·부수찬(副修撰) 등을 지내고, 1535년 개성부교수(開城府敎授)를 지내면서는 유생 112인을 거느리고 왕에게 전(箋)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1541년에는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재직 중에는 사간원으로부터 “인품이 비루하고 가는 곳마다 탐욕스럽고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긴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사림(己卯士林)들이 활약 때 포의(布衣: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 묻혀있는 선비)로서 상소하여 그 그릇됨을 비판함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받아 과거 급제 후 홍문관에 들어가 크게 선용(選用)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