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4년(영조 40)에 영조는 1644년(갑신년)에 멸망한 명나라와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추모사업을 벌였다. 그중 하나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거하다가 순절하여 강화 충렬사(忠烈祠)와 남한산성 현절사(顯節祠)에 제향된 충신과 명나라 유민의 후손들을 위해 ‘충량과(忠良科)’라는 이름으로 정시(庭試) 문무과를 시행하였다.
강화 충렬사에는 김상용(金尙容) 등 병자호란 때 순절한 사람들이, 남한산성 현절사에는 홍익한(洪翼漢) ·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 등 병자호란 때의 삼학사와 김상헌(金尙憲), 정온(鄭蘊) 등이 제향되어 있었다.
시험은 1764년(영조 40) 2월 8일에 시행되었는데, 문과에서는 김노순(金魯淳) 등 5명을 뽑고 무과에서는 이추(李樞) 등 14명을 뽑았다. 그 후 1770년(영조 46)과 1772(영조 48)~1775년(영조 51)에 명나라 태조 · 신종 · 의종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창덕궁 대보단을 향해 망배례(望拜禮)를 지낸 후 의례에 참석한 충신과 명나라 유민의 후손들을 대상으로 충량과를 실시하였다.
이때 '충량과'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나 1764년처럼 정식 과거시험이 아니라 유생 제술의 형식으로 시행하여 직부(直赴)의 상을 내렸다. 곧 우등자에게 문과 급제에 상응하는 직부전시(直赴殿試)나 문과 초시 합격에 해당하는 직부회시(直赴會試) 등의 자격을 주었다.
'충량과'라는 용어는 영조 대에만 사용되었다. 하지만 정조 대 이후에도 왕이 망배례를 거행한 후에 충신과 명나라 유민의 후손으로 의례에 참여한 유생과 무사들을 위해 특별 시험을 시행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우등자에게는 직부전시나 직부회시의 자격, 상품, 책 등을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