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책. 국문필사본.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동일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본에는 앞과 뒤에 각각 “긔묘년 졍월 슌망”, “긔묘년 졍월 상원” 운운의 필사기가 적혀 있다. 현재는 국문본만이 남아 있다. 작품 가운데 장황한 한문의 원문과 번역문이 함께 실려 있는 부분도 있고 한문구가 거듭 나오는 것으로 보아 원본은 한문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786년(정조 10)에서 1790년까지 3차에 걸쳐 단계적으로 필사된 서울대학교 도서관본 「옥원재합기연(玉鴛再合奇緣)」의 제14권 표지 안쪽에 당시 유통되었던 소설 제목이 여럿 적혀 있다. 그 가운데 「취미삼선록」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이 18세기 후반에 세간에서 유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양공주는 광무황제의 장녀로서 곽황후의 소생이다. 건무 17년에 곽후가 폐위되어 동해로 유배되자 무양공주는 극히 애통해하면서도 음후 섬기기를 효성스럽게 한다. 무양공주의 나이 15세 되던 해에 황제가 능양후 태복경 양송의 재주를 흠탄하여 공주의 부마로 정한다.
양송의 아버지 시어사 양선은 청간정직한 인물이고 그 부인 마씨도 정숙하다. 양송은 풍채는 빼어나지만 인품이 방탕하여 조강지처인 허씨의 풍정이 담박한 것을 싫어해서 구박하여 집으로 돌려보낸 터였다. 무양공주는 예식을 올린 후 구고(舅姑 :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게는 극진히 하면서도 양송에게는 담박히 대하므로 양송은 불만스러워한다.
무양궁이 성대하게 완성된 뒤 무양공주는 허씨의 사실을 아뢰어, 양송이 허씨를 다시 받아들이도록 황제가 직첩을 내린다. 허씨는 황제의 하교와 시아버지 양공의 권유에 못 이겨 시댁으로 돌아온다.
무양공주와 허씨가 만나 동기처럼 친밀해져, 함께 정성으로써 양송을 점점 개과하게 한다. 공주는 이남 일녀, 허부인은 삼남 일녀를 낳은 뒤 양공 부부가 세상을 떠난다. 본래 공주는 곤륜상선이고 허씨는 낭원옥녀였다.
구고가 돌아가신 뒤 무양공주는 한 달에 20일은 대내에서 보낸다. 황제가 어느 날 곽후 태생의 세 공주에게 소원을 물으니 모두 곽후 만나 보기를 소원한다. 또, 무양과 여읍이 방탕한 부마와 합하지 못하므로, 종남산 취미궁을 하사해주고 부마들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주면 그곳에서 노닐고 싶다고 아뢴다. 황제가 현판을 써 취미궁을 세 공주에게 하사하고 사례태감 장경으로 궁을 지키게 한다.
무양공주가 곽후의 화상을 깁에 그리니 모셔놓고 모두 슬퍼한다. 회양·연평·날양·연양공주와 태자 친왕이 태후와 황제 황후를 모셔 취미궁에 놀러왔다가 곽후의 화상을 보게 된다. 곽후의 화상이 평복을 입고 있으니, 황제가 “17년 황후였으니 법복 입음도 가능하다.”고 하며 그림 고칠 사람을 찾으니 음후가 직접 나서 고쳐 그린다.
이 때 곽후의 소생인 동해왕·제랑왕은 본국에 가 있고 중산왕이 모시고 있다가 모후의 화상을 보고 슬퍼한다. 태후가 연평공주에게 명하여 과거 농사 짓던 시절의 곽후의 형상을 그리게 하자 황제가 보고서 참괴해 한다. 세 공주가 자주 취미궁에 노닐자 세 부마가 대노하여 군사를 발하여 궁문을 깨치려 한다.
음후가 이 소동의 소식을 알고 세 공주로 하여금 구가(舅家 : 시집)에 가 석고대죄하도록 꾸짖는다. 중양절에 세 공주가 곽후의 모친인 곽주를 중산왕과 함께 모시고 취미궁에 가서 곽후의 화상을 보도록 한다. 곽주는 슬퍼하면서도 음후의 덕을 기린다.
황제가 어느 날 세 공주를 불러 앉히고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꿈에 자신은 여자가 되고 곽후는 남자가 되어 자신이 곽랑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농사 지으며 고초를 겪으면서도 금슬이 좋았으나 곽랑이 벼슬하여 대장군이 된 후, 음땅에서 미인을 얻어 온 뒤로부터 홀대를 당하였다. 후일 천자가 되어 난양에 도읍한 뒤에도 음후를 황후로 삼고 자신은 후궁으로 삼으려 하다가 태후의 권유로 자신을 황후로 삼기는 했으나 분한 마음이 사무쳐 지내게 된다.
이 후 폐위되어 동해로 유배되고 태자는 강등되어 번왕이 됨고, 왕이 비를 얻어 자신을 정성껏 모시기는 하나 마음은 늘 편치 않았다. 황상이 병환으로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왕이 급히 달려 가는 데에서 꿈에서 깼다고 한다.
세 공주가 듣고 모두 웃고 울며 모후를 생각한다. 마황후가 기세(棄世)한 날, 날양공주가 꿈에서 옥경에 들어가 옥제의 잔치에 참석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이 참예함을 본다. 인간세계에서 곤고했던 곽주의 아들 번왕은 영보도군에 봉해지고 인간세계에서 부귀하고 금슬이 좋았던 날양공주 부부는 이별하게 됨을 본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폐비 곽후와 계비 음후, 그리고 그 자녀들이 등장인물로 설정된 것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기본으로 하여 허구적 상상력으로써 꾸민 것이다. 그 외곽은 도선적 요소의 환상적 분위기로 그려져 있으나 등장인물의 성격묘사나 작가의식은 사실주의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다.
무양과 관도와 여읍의 세 공주의 부마들의 부화방탕한 성격과 생활을 그대로 그려 보이면서 “비록 왕공 부귀 잇셔도 졔 마음이 즐겁지 아니한직 슬룬 사람이오 누항필부라도 졔 듯지 즐거오면 인간락사라.” 하는 슬픈 탄식이 공주의 입에서 나오게끔 한다.
또 작품의 뒷 부분에서 광무황제의 꿈에 남녀관계가 뒤바뀌어 곽후는 남자로 황제는 여자로 변하여 황제와 곽후가 겪은 일을 거꾸로 겪도록 설정함으로써, 조강지처이면서 첩을 투기하고 해를 끼치려 한다는 이유로 쫓겨난 곽후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아가 남성 우위의 봉건시대에 여자가 겪는 설움을 드러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