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탕건은 망건과 함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감싸고 상투를 가리기 위한 것이지만, 조선시대의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는 의관(衣冠)에 대한 유교적 관습에 따라 평상시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품으로 여겼다. 본래 망건 위에 쓰고 그 위에 반드시 갓을 얹어 쓰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서민들에 대한 갓의 착용이 허용되고, 집안에서 갓 대신 탕건만 쓰는 풍조가 늘어나면서 점차 독립된 모자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탕건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뒤가 높고 앞쪽으로 한단이 낮은 형태로 보아 복두(幞頭) · 사모(紗帽) 등과의 형식적 관련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경국대전≫의 경공장(京工匠)에는 갓일과 망건장 · 사모장 · 초립장 등은 있으나 탕건장은 없는데, 사모장의 일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경도잡지 京都雜志≫ 풍속조에 당건(唐巾)이라는 용어를 탕건으로 풀이하였다.
이것은 탕건의 명산지로 평안북도 정주를 들고 있는 19세기의 민간기록인 ≪규합총서 閨閤叢書≫의 팔도물산조(八道物産條)와 함께 탕건이 18세기 이전부터 유행하였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탕건은 갓의 직립부분인 총대우 · 망건 · 정자관(程子冠)과 같이 말총을 소재로 하여 겯는다.
말총은 부드러운 느낌과 유연성으로 인하여 착용감이 좋고 견고하며, 땀이나 기름때에 잘 오염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세탁도 용이한 장점이 있다. 제작시에는 골〔木型〕을 크기에 따라 받쳐놓고 모양을 잡아가며 결은 뒤, 외형을 견고하게 굳히기 위하여 골에 끼운 채로 삶아내어 완성한다.
모짐놓기, 박죽넣기와 소넣기, 줄이어가기와 상지 만들기, 구갑과 나비단추 만들기의 순으로 진행되는 기본 제작 과정에서 가장 기술을 요하는 것은 말총을 알맞은 힘으로 당기고 맺는 힘의 안배이다. 외형이 완성되면 참먹을 진하게 갈아 바르고 햇볕에 말리는 묵염처리(墨染處理)로 마감한다. 2층관과 정자관의 제작과정이 탕건과 유사하여 탕건장이 함께 제작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평안도의 정주 · 안주와 호남의 논산 · 김제 및 제주도가 명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제주도의 탕건은, 홑겹으로 겯는 홑탕건〔疏宕〕과 겹탕건〔密宕〕, 2중 ·3중 ·5중 사망(絲網)의 기법으로 사각무늬를 정교하게 시문하는 바둑탕건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말기에는 제주도에서만 한해에 수만 개의 탕건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1895년 단발령 이후 의관풍속이 크게 변모하면서 탕건의 수요기반이 해체되기 시작하였고, 탕건장도 점차 줄어들어 기술이 절연될 위기에 직면하였다. 현재는 제주도의 여성 몇 명에 의하여 겨우 전승되고 있는데, 특히 김공춘(金功春)은 전통탕건 제작기술의 원형을 잘 계승하여 1980년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고, 2020년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