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신 높이 2m, 너비 0.96m. 원래 경상북도 봉화군 하남면 태자리태자사에 있었으나 폐사된 후 조선 중종 때 영천시 영천면 휴천리로 옮겨졌고, 다시 1918년 경복궁 근정전 회랑으로 비신만이 옮겨졌다. 현재는 2005년 용산구로 이전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신 중간부가 절단된 이외에 상태는 좋다.
낭공대사는 신라 효공왕·신덕왕 때의 명승으로 법명은 행적(行寂),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일찍이 불교에 뜻을 두고 가야산 해인사에서 불도를 닦았으며 855년 천복사(泉福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871년 당나라에 건너가 15년간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도하고 귀국한 뒤 효공왕의 존숭을 받으며 석남산사(石南山寺)의 주지로 있다가 입적하였다. 이에 경명왕은 낭공대사라 시호하고 백월서운이라 탑명을 내렸다.
비문의 앞면은 경명왕의 명으로 최인연(崔仁渷)이, 뒷면은 대사의 문하법손(門下法孫)인 석순백(釋純白)이 지었다. 입비 연대는 앞면 비문을 지은 뒤 세우지 못하다가 954년(고려 광종 5)에 순백의 후기(後記)와 함께 새겨 세웠다.
글씨는 자경(字徑) 2∼3㎝의 행서로 대사의 문인인 석단목(釋端目)이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였다. 따라서 김생의 글씨를 연구함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다. 당시 유행하던 구양순류(歐陽詢類)의 글씨를 따르지 않고, 진(晉)과 남조(南朝)의 필의를 모방하면서도 획에 태세곡직(太細曲直: 굵고 가늘며 굽은 것과 곧은 것)의 변화를 일으켜 가히 신품(神品)이라 할 만하다.
한편 비의 측면에는 조선 중종 4년(1509)에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태자사지로부터 영천의 자민루(字民樓)로 옮겨온 사실이 박눌(朴訥)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