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성지 ()

통영 통영성지 내 북포루
통영 통영성지 내 북포루
건축
유적
1678년(숙종 4년)에, 통제사 윤천뢰가 경상남도 통영에 만든 성곽의 터.
이칭
이칭
통제영성
유적
건립 시기
조선시대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윤천뢰
높이
4.5m
둘레
3,660m
면적
156,851㎡
소재지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 북신동, 명정동, 태평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통영성지(統營城址)는 1678년(숙종 4년)에 통제사 윤천뢰가 경상남도 통영에 만든 통영성 성곽의 터를 말한다. 통영성은 삼도수군통제영성의 준말이다. 이 성은 북쪽 여항산 정상에서 동쪽과 서쪽의 고지를 연결하여 산지는 흙으로 성을 쌓았고 나머지 부분은 돌로 성곽을 쌓았다. 사대문과 동서 암문, 세 곳의 포루가 있었고, 원문성이 바다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통영성은 통제영이 해체되면서 성벽과 문루를 헐어버려서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정의
1678년(숙종 4년)에, 통제사 윤천뢰가 경상남도 통영에 만든 성곽의 터.
위치와 현상

통영성(統營城)은 조선 후기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 수군을 통솔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 자리하고 있었던 통제영성을 말하는 것이다. 1678년(숙종 4년)에 통제사 윤천뢰가 경상남도 통영시 시내 북쪽에 위치한 해발 173.9m 여항산을 배후로 둘레 2,800m, 높이 4.5m, 폭 4m로 성곽을 쌓은 평산성(平山城)이다. 현재의 북신동, 문화동, 명정동, 태평동, 정량동에 성곽이 걸쳐 있었다.

통영성은 북문 북쪽의 여항산 기슭에서 서문 북쪽의 산기슭과 여항산 양쪽 등성이까지 약 1,000m는 토성으로 쌓았고 나머지는 석성으로 쌓았다. 1895년에 통제영이 없어지고 일제강점기에 성벽과 문루(門樓)를 헐어버림으로써 지금은 토성의 터와 석성의 일부분만 남아 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토성의 기단부(基壇部)는 흙을 깎아 만들었고 상부로 가면서 돌을 넣고 흙을 다져 사다리꼴 모양으로 성을 쌓았다. 남문을 위시한 4대문과 2개의 암문 양쪽에는 네모반듯하게 다듬은 무사석(武沙石)으로 협축(夾築)하였다. 서문에서 남문 사이의 체성(體城)은 지세를 따라 외벽과 내벽을 협축으로 쌓거나 외벽은 석축하고 내벽은 안을 흙으로 채워 쌓았다.

해자는 확인되지 않았고 사용된 석재나 축조 수법에서 차이가 많아 축성 이후 열러 차례에 걸친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院門)은 1682년에 통제사 원상(元相)이 설치한 것으로 원문고개의 좌우측 능선을 따라 해안까지 쌓았다. 조사 결과 원문은 너비 3.54.5m, 높이 0.21.2m의 돌이 원문고개에서 북신만까지 약 100m에 걸쳐 이어진 것이 확인되었다.

건립 경위

『여지도서』에 통영성은 둘레 11,730척(尺), 높이 15척, 여장(女墻)은 700타로, 4대문과 동서 암문이 있고 3곳의 포루(砲樓)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문은 2층으로 된 누문(樓門)으로 석축의 좌우가 바다에 닿았는데 좌변은 길이 151보, 우변은 202보이며 영에서 10리 거리에 있었다고 하였다. 못은 남문, 북문, 운주당 동변 등에 3개가 있다고 하였다.

변천

조선 말기에 편찬된 통영지에도 『여지도서』와 거의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일부 변화도 보인다. 3개의 연못은 성을 처음 쌓을 때 같이 판 것이며, 성 내에는 9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동문, 서문, 남문은 모두 홍예문(虹霓門)이고 동암문과 남암문 역시 성을 처음 쌓을 당시에 축조한 것이다. 세 개의 포루는 동과 서, 북쪽의 산 정상에 위치하며 1694년(강희 33) 통제사 목림기가 건립하였다. 이 포루는 통영성을 방비하던 산성 중군이 순찰과 경비를 하던 초소로 때로는 군사들을 지휘하였기에 장대(將臺)라고도 하였다.

형태와 특징

통영성은 평지와 산지의 지형을 절충해서 지은 반산성식이다. 북쪽의 여항산을 등에 지고 동쪽과 서쪽의 고지를 지나 해안을 차단하면서 성을 쌓았다. 또한 군영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장소에 원문을 설치하였는데, 바다에 닿도록 석축하여 원문이 일종의 관문성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의의 및 평가

통영성은 삼도수군통제영성의 준말로 오늘날 통영시의 모체가 된 성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성벽과 문루를 헐어버렸고, 통영성지 근처가 시가지로 변해 현재는 성곽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참고문헌

원전

『輿地圖書』
『統營誌』

단행본

경남문화재연구원, 『통영시내 서포루일원 지표조사-통영시 문화동216번지 일원-』(2003)
국보학술연구원, 『통영 원문성지-통영 애조원지구 도시개발 사업부지 내-』(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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