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성지(大靜城址)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 인성리 · 보성리 일대에 남아있는 성곽의 터이다. 성내에는 사적 487호 추사유배지를 비롯하여 제주도 민속자료 제2호 돌하르방 12기, 제주 전통 옹기를 재현하는 가마터 등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1986년 성곽을 보수하기 시작한 이래 북벽과 동벽, 남벽 일원과 동북치, 서남치 등을 복원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대정현성은 대정현이 설치된 2년 후인 태종 18년(1418)에 대정현감 유신에 의해 1개월 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대정현성의 둘레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179보(7,074척)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2,647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성의 둘레가 다르게 기록된 이유가 1416년(태종 16) 오식이 고정의성을 쌓았지만 1423년에 정의현성을 다시 쌓은 것과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지 혹은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 분명하게 밝혀진 바 없다.
대정현성은 초축 당시 동 · 서 · 남쪽에 문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대동지지』에는 옹성(甕城)이 넷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후대에 성을 수축(修築)하는 과정에서 북문을 따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대정현성의 둘레가 임진왜란 이전에는 2,647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동국여지지』와 『대정현읍지』에는 4,890척으로 다르게 기록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성 안에는 둘레 22장, 깊이 4척의 못과 남문 내에 둘레 4장, 깊이 6장 8척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해(旱害)가 들면 못과 우물이 바로 말랐다고 하였다. 『남사록』에는 성 안에 '우물이 하나 있지만 가물면 말라버려서 관아의 남쪽 5리에 있는 파고천에서 물을 긷는다'라고 적혀 있다. 세종 12년과 25년에 '정의현과 대정현 두 현 모두 성내에 샘물이 없어 정의현은 토산으로 옮기고 대정현은 감산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결국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였다. 물 부족은 대정현성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였다.
지표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정현성은 평지에 축조된 네모꼴의 성으로 동서의 길이는 380m, 남북의 길이는 320m, 둘레는 1,440m였다. 성의 각 모서리에는 각치(角雉)가 설치되어 있었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북측 체성(体城)의 외벽은 높이가 2.8m3.7m, 내벽은 2.7m3.6m, 폭은 2.7m3.1m이고 관상용으로 사용된 미석 일부가 남아 있다. 치성(雉城)은 상부가 훼손되어 알 수 없으나 둘레는 34.6m42.8m이다. 동 · 서 · 남쪽의 문지와 옹성(甕城)은 훼손되었는데 동문의 옹성이 3~4단 정도 남아 있다.
체성은 현무암을 장방형(長方形)과 방형(方形)으로 다듬어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병행하여 외면을 맞추어 축조하였다. 치성은 성벽에 덧대어 축조하였다.
성의 안팎을 따라 너비 10척의 해자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는데 조사 결과 해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정현성에는 물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읍성 주위에 물이 흐르는 해자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보고서」에는 비가 오면 대정현성 주변으로 물이 모이는 것을 보고 해자를 설치했던 것으로 오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대정성지는 대정읍성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 한편 성곽이 초축된 시기는 기록에 남아 있지만 이러한 기록만으로는 성이 변화해온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특히 다른 읍성의 경우 성의 높이가 대체로 15척을 넘지 않는데 비해 대정읍성은 28척, 정의현성은 24척에 달하는 높은 성이었다. 읍성의 높이에서 보이는 특이점이 제주 지역에 세워진 성의 특징인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대정읍성에 해자가 설치되었는지 여부도 기록된 것과 달라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