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진례산성은 둘레가 약 4.5㎞를 상회하는 대형의 성이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지만 성의 남쪽 구간은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체성은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성 내외의 경사도가 큰 곳은 편축으로, 경사도가 작은 곳은 협축으로 축조하였다. 체성의 동쪽은 자연 암반에 덧대어 쌓아 자연 지형을 이용하기 위한 방법으로 추정된다. 내벽은 암반층을 정지하고 10㎝ 내외의 작은돌과 부식토를 혼합하여 다진 다음 깬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렸고 폭은 100~120㎝이다. 체성의 폭은 210㎝ 정도이며 외벽은 내벽과 같이 암반 위에 축조하였다. 남문지는 비음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문지는 체성에 덧대어 쌓았고 폭은 320cm 정도이다. 문지는 와편을 이용하여 기초 다짐을 하였기 때문에 많은 양의 와편들이 수습되었는데, 와편들은 수키와와 암키와가 주류를 이룬다. 와편에는 무문, 어골문, 삼각집선문, 격자문, 복합문 등이 시문되어 있고 「봉림사(鳳林寺)」 명(銘) 기와도 확인되었는데, 두께나 색조, 태토 등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파수와 상평통보, 조선시대의 도기 편들이 채집되었다.
이와 같이 진례산성에서 보이는 세석 다짐을 한 뒤 지대석을 설치하는 것이나 대석을 놓고 그 주위를 작은 깬돌로 쌓는 수법은 웅천읍성, 김해읍성, 거제 고현읍성 등과 같은 조선시대 읍성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축성 수법이다. 출토 유물도 조선시대의 기와와 상평통보가 출토되어 창원 진례산성은 조선시대 들어 축조되어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문지에서 발견된 「봉림사」명 기와는 봉림사가 폐사된 후 가져왔을 것이므로 축조 수법이나 출토 유물로 보아 창원 진례산성은 봉림사가 폐기되고 난 이후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창원 지역의 입보성으로 축조되었고 상평통보가 통용되던 후기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원 진례산성은 4.5km가 넘는 둘레나 축조 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축조된 성이 분명하고 선대의 유구도 확인되지 않아 기록에 보이는 신라 하대의 진례성으로 볼 수 없다. 실제로 창원 진례산성의 위치를 살펴보면 진례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왜적이 창원으로 진입하는 진해만을 바라보고 있어 주된 방어공간은 창원이라고 할 수 있다.
창원 진례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진례산성을 신라 하대의 진례성으로 본 것을 비판 없이 수용하여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하였고 측량 결과 창원에 속하는 것으로 판명되어 붙은 이름이다. 이와 같이 창원 진례산성은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기록된 통일신라시대의 진례성은 아닌 것이 분명하므로 창원 진례산성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현재 성이 위치한 비음산의 이름을 따라 창원 비음산성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