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산성(天生山城)은 경상북도 구미시와 장천면의 접경에 위치한 천생산(해발 406.8m) 정상 주위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석축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생산은 멀리서 보면 산 정상 위로 깎은 듯한 장방형 암반이 드러나는데, 이것이 마치 성처럼 보여 천생성산으로도 부른다.
천생산성은 『인동부읍지(仁同府邑誌)』에 혁거세가 성을 세웠다고 적혀 있으나 이는 후대에 전승된 기록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경상도지리지』에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피하여 입보한 도내 산성 중에 천생산성이 포함되어 있어 고려시대에는 이미 축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전기 『지리서』에 의하면 천생산성은 둘레 1,947척, 높이는 때로는 78척 때로는 45척이고, 내부에는 우물 1기, 못 2기가 있다고 하였다. 외성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1601년(선조 34)에 곽재우가 찰리사로 계문하여 쌓았는데 당시 성의 둘레가 3,612척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천생산성은 원래 내성만 있었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외성을 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면 장방형의 천생산성은 내성과 외성 모두 북서쪽으로는 솟아오른 자연 암반을 이용하였으며, 남동쪽으로만 8~9부 능선을 따라 석축으로 쌓았다. 암반이 드러난 구간은 석축이 없고 소계곡이나 평지에만 돌을 쌓았다. 지표 조사에서 확인된 내성의 둘레는 1,298m, 외성 둘레는 1,322.5m이다. 내성에는 장대지를 비롯해 서문지, 남문지, 동문지와 수구문, 암문, 치, 망루, 포루 등을 설치하고 내부에는 건물지와 못, 우물 등을 조성하였다. 외성에는 동문과 치를 설치하였고 내부에는 못을 조성하였다.
천생산성 내성의 암문에 대한 조사 결과, 배수로가 폐기된 이후 수리 · 증축하여 암문을 설치한 것이 확인되었다. 배수로에서는 15세기 이전의 암키와가, 계단 통로에서는 어골문 기와편과 조선 중기 백자편이 출토되어 시기 차를 보여준다. 특히 성벽 안쪽 상부에서 수습된 기와 가운데 사절흔(砂切痕)이 관찰되는 고려시대 어골문계와 격자복합문이 확인되었다. 이는 고려시대에도 천생산성을 이용하였다는 증거로, 『경상도지리지』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개축의 흔적과 유물이 보여주는 시기 차는 천생산성의 초축 연대가 적어도 고려시대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편, 조선 초기의 수리와 증축, 임진왜란 후 조선 후기까지 별장과 승장이 배치된 것을 통해 산성을 사용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천생산성은 천생산 정상에 돌출된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한 장방형 석축 산성으로 고려시대부터 입보 산성으로 이용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산성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외성도 축조되었다.
천생산성은 고려시대 이후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입보용 산성이다. 조선 전기부터 외성이 축조되는 임진왜란기까지의 기록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한 지표 조사와 암문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거쳐 산성의 전체적인 사용 시기가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