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읍성(淸道邑城)은 경상북도 청도군에 있는 평지 석축 읍성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어졌다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수리하면서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성의 대부분이 훼손되어 현재는 일부 흔적만이 남아 있다. 1995년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청도읍성(淸道邑城)은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성의 대부분이 훼손되었다. 현재 너비 5.05.4m, 잔존 13단, 높이 1.5~2.2m 정도의 성벽만이 남아 있다.
성의 4대문에 대한 조사 결과, 북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개거식(開渠式)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차례에 걸쳐 성문이 보수된 흔적과 옹성(甕城)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동문지, 서문지, 남문지는 개발로 인해 훼손되어 문이 있던 자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동쪽과 북쪽의 본성은 내 · 외벽을 협축하고, 내부는 천석과 뒤채움 토로 채웠다. 외벽은 기초석 위에 기단석을 놓은 다음 들여쌓기를 하였고, 벽의 아랫부분은 흙과 찰흙같은 점질토로 보강하였다. 내벽은 내부를 채운 돌보다 조금 큰 천석을 이용해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았는데 후대에 변형되고 훼손되어 정확한 축성 기법은 알 수 없다.
동벽의 적대(敵臺)는 본성을 만들 때 같이 쌓았고, 치성(雉城)은 북문의 동쪽과 서쪽 90m에 거리에 대칭이 되도록 배치했다. 해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기와 조각과 전돌, 그리고 조선 후기의 백자 접시, 종지, 흑유 접시가 출토되어 청도읍성의 주된 사용 시기를 보여준다.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에서 '보이는 둘레 190보에 물이 없다'고 한 청도읍성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피하여 청도군성을 일시적으로 동쪽 7리쯤에 있었던 폐성(吠城)으로 이전하고 조선 개국 초기까지 읍성에 편입했던 결과로 보인다.
오늘날 복원된 청도읍성은 1589년(선조 22)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성일이 정세의 위급함을 조정에 알린 후 만들어졌다. 동래에서 한양까지의 직선로에 인접한 주군의 성지를 보수하고 없는 곳은 새로 축조하게 하여 만든 것이다. 당시 군수 김은위가 1590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2년 만에 공사를 끝냈다.
처음 건설된 청도읍성은 그 둘레가 1,403척이었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1,570보로 확장되었다. 주척(周尺)으로 환산하면 1,884m가 되는데, 이는 지금의 둘레와 비슷하다. 청도읍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성내의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기유년(1549)에 군수 유비가 건립한 동문 무회루도 병화로 소실되었다.
임진왜란이 지난 후 나온 『여지도서(輿地圖書)』 와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청도읍성의 동문, 서문, 북문만 나와 있다. 그러나 1896년에 간행된 『청도군읍지』에는 군수 김도근이 새로 만든 남문인 진남루가 나온다. 남문은 1872년에 나온 「지방지도」에도 남아 있다.
청도읍성은 우리나라 읍성 가운데 드물게 '평지 읍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또한 각 문지에 옹성, 적대와 함께 각루(角樓)까지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 읍성은 전란 때 방비를 위한 이상적인 성체를 구현한 성곽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