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읍성은 1910년대 이전까지는 중축(重築), 개축(改築), 신축(新築) 등을 통해 읍성과 내부 관아 시설을 유지하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제주읍성과 문루(門樓), 관아 건물, 누각과 정자 등이 헐리기 시작했다. 특히 1926년부터 일제가 동 · 서 부두를 축조하고 산지포를 매립하는 ‘산지항 축항 공사’를 진행하면서 제주읍성의 성돌을 바다에 매립하였다. 이로 인해 제주읍성의 체성은 대부분 훼손되었다.
현재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은 기념물로 지정된 오현단 남쪽의 성곽 170m 정도이다. 이곳 성곽 외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3.64.3m, 체성의 너비는 5.36.9m이며, 성문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치성은 3개소가 보존되어 있으나, 산지천과 인접한 동치성만 원형대로 남아 있고 나머지 2개소는 보수가 이루어졌다. 동치성은 장방형(長方形)으로 길이 1.1m, 폭 8m 내외의 평면 형태를 띠고 있다. 동치성의 성벽 연접부에서 돌출된 치성(雉城) 부분을 감아 도는 여장(女牆, 女墻)이 확인되었다. 여장은 성벽 바깥쪽 가장자리를 따라 장방형으로 만들었고 체성과 같은 석재로 축조하였다. 동치성 상단부에서 철(凸)자형의 기단 석렬과 정면 1칸, 측면 2칸의 평면 장방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 중 ‘임신이월(壬申二月)’, ‘병인(丙寅)‘, ‘수성소(守城所)’ 등이 적힌 명문 기와는 19세기 후반의 것으로 제주읍성이 수축된 시기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성지(濟州城址)는 제주목 읍성의 터를 말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910보"라 적혀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4,394척, 높이 11척으로 적혀 있어 기록에 따라 읍성의 둘레는 1,000척 가량 차이가 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주현성을 읍성으로 기록한 예가 적지 않은데 주성인 제주읍성 서북쪽에 고성의 유지가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세종실록지리지』에 기재된 석축 읍성은 고려시대 탐라현의 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제주읍성은 1565년(명종 20)에 동성을 뒤로 물려서 쌓았으며, 선조 32년에는 성을 개축하여 성의 둘레가 6,120척에 이르렀다. 한편 『탐라지(耽羅志)』, 『동국여지지』 등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읍지에는 제주읍성의 둘레를 5,489척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제주읍성이 여러 차례의 증축과 수축을 거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탐라지』나 『여지도서』에는 제주읍성에 동 · 서 · 남문이 있다고 적혀 있어, 성을 축조할 당시부터 3개의 문이 설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정원루는 남문 초루”라는 기록은 신증(新增)한 내용이므로 문루를 올린 시기와 제주읍성을 축조한 시기에는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지』에 3문의 이름이 남아 있어 이때 이르러서야 모든 성문에 문루를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부터 성내 여러 건물에 변화가 있었지만 동 · 서 · 남 3문과 수구 2문은 조선시대 말까지 유지되었다.
『탐라지』와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격대 27개소, 타첩(垜堞) 404개소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참호 위에 판교(板橋)를 걸쳐 인마가 지나다녔다고 한다. 군사 중에는 거교군(擧橋軍)이 포함되어 있어, 제주읍성에 해자와 조교(弔橋)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으로 구성된 1목 2현 체제로 운영되었다. 제주읍성은 제주를 대표하는 주성으로 여러 차례의 증측과 개축이 이루어진 성이다. 또한 물을 얻기 위한 성내 구조물은 제주읍성에 설치된 특별한 시설이며, 특히 해자 위로 조교를 설치한 제주읍성과 같은 사례는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드문 경우이다.
제주성지는 제주읍성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