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558년(명종 13)에 이루어진 이황의 「회암서절요서(晦菴書節要序)」 및 그 목록 초본이 외현손 홍유형(洪有炯)에게 입수되었고, 뒤에 홍유형의 사위 박자진(朴自振)에게로 전존(傳存)되었다. 박자진은 1674년(현종 15)과 1682년(숙종 8) 두 차례에 걸쳐 수원(水原)의 무봉산(舞鳳山)에 숨어 살던 송시열에게 가서 제발(題跋)을 받았다.
박자진의 외손 정만수(鄭萬遂)가 이를 입수하여 1746년(영조 22) 아버지 정선(鄭敾)의 그림을 받고 자신이 지어(識語: 표지어)를 쓴 뒤 같은 해에 정선의 친우인 이병연(李秉淵)의 시를 받았다. 그 뒤 1872년(고종 9) 임헌회(任憲晦)가 입수하여 자신의 후지(後識)를 첨가하였고, 다시 김용진(金容鎭)의 제서(題書)가 첨가됨으로써 현재의 첩이 이루어졌다.
이황의 「회암서절요서」에는 그의 유명한 편저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선집(選輯) 의도가 나타나 있는데, 1558년 도산(陶山)에 은거할 때의 소작이다. 송시열의 제발은 2편이 실렸는데, 첫 제발은 1674년 예송(禮訟) 문제로 수원 무봉산 중에 은복할 때 쓴 것으로 박자진이 이 초고를 입수하게 된 경위와 자신의 소감을 적고 있다. 두 번째 제발은 1682년에 쓴 것으로 역시 무봉산 중에서 그 초고를 다시 보게 된 소감을 적고 있다.
정선의 4폭 묵화(墨畵)는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 일대의 전경을 배경으로 그 안에 서안(書案)을 앞에 놓고 학문을 연마하는 이황을 주제로 그린 「계상정거(溪上靜居)」, 무봉산 일대를 배경으로 초정(草亭)에서 대좌한 송시열과 박자진을 소재로 그린 「무봉산중」, 박자진의 제택(第宅) 전경을 소재로 그린 「풍계유택(楓溪遺宅)」, 정선 자신의 제택 전경을 소재로 그린 「인곡정사(仁谷精舍)」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만수의 지어에는 「회암서절요서」 초본의 입수 경위와 저간의 내력, 정선이 묵화를 그린 사실들이 적혀 있고, 이병연의 제시는 이황 · 송시열의 글과 정선의 그림에 대해 칠언절구로 읊은 것이다. 임헌회의 후지에는 이 첩을 입수한 사실과 자신의 소감이 적혀 있으며, 김용진의 제서는 독특한 필체로 쓴 10자인데 지보(至寶)임을 감탄하고 보장(保藏)을 다짐한 내용이다.
이 첩을 구성하는 개개의 문편(文篇)과 화폭들은 역사상의 명유(名儒), 명화가, 명시인의 자작자필의 것이라는 점에서 각각 독자적인 문화유산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회암서절요서」 초본이 전존되는 과정에서 이 첩이 형성되었는데, 그 형성 과정 또한 우리 선조들의 정신적인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