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축성당시 공사의 책임을 맡은 관리들이 성벽에 새긴 사무적 기록으로, 관리들의 이름·관직과 담당구역 및 축성연대 등을 통하여 고구려평양성의 축성상황을 일부 살필 수 있다.
현재까지 4개의 각석(角石 : 모돌)이 발견되었다. 오늘날 평양시 일원의 성벽이 고구려시대의 도성(都城)으로 사용되어왔음은 거의 확실하나, 이곳이 장수왕 15년(427)에 천도한 평양성인지 평원왕 28년(586)에 천도한 장안성(長安城)인지에 대해서 아직까지 확실한 논거는 없다.
단지, 수도의 위치와 주위의 사정으로 미루어 평원왕대로 추정하고 있어, 각석에 보이는 ‘丙戌·己丑·乙酉’를 평원왕 8·11·31년(566·569·589)으로 보고 있다.
반면, 2개의 기축년 석각을 실은 《해동금석원 海東金石苑》에서 김정희(金正喜)와 청나라의 유희해(劉喜海)는 장수왕 37년 (449)으로 고증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乙酉’를 잘못 읽은 것으로 본다.
명문은 각석한 지점으로부터 서·동·서북 등의 방향으로 11리·12리의 성벽을 소형(小兄)의 관직에 있는 아무개가 책임지고 쌓았다는 내용으로, 일정한 계획 아래 축성공사가 진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명문 중의 ‘漢城下後部(한성하후부)’나 고구려 귀족집단으로 오부(五部)의 하나인 계루부(桂累部)라는 뜻의 ‘卦累(괘루)’는 고구려인들이 축성에 쏟은 열의를 엿볼 수 있다.
아울러 명문 중의 ‘節·卩’ 등은 고구려 속문표기(俗文表記)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어 문자자료로서 매우 귀중하다. 글씨는 성석의 생김새에 따라 크기와 행수를 자연스럽게 처리하였으며, 서체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해서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