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언절구. 6수. 작자가 평양으로 떠나는 벗 이덕무(李德懋)를 전송하면서, 평양의 유적에 얹어 감회를 적은 시이다. 연작형식의 작품이다. 『정유집(貞蕤集)』과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실려 있다.
「평양잡절송이무관」은 박제가의 20대 초년의 작품이다. 평양의 무열사(武烈祠)와 기린굴(麒麟窟), 선연동(嬋姸洞)과 능라도(綾羅島), 정전(井田)과 연광정(練光亭) 등의 경물과 사실(史實)을 노래하였다.
「평양잡절송이무관」의 무열사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들의 무열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사당이다. 이곳에는 석성(石星)과 양원(楊元)을 비롯하여 이여송(李如松) 등의 5인의 화상을 모셔 두었다. 그런데 이곳에 화재가 나 석성과 이여송의 화상만이 남은 것을 보았다. 그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평양잡절송이무관」의 기린굴은 옛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유적으로 전해지는 기린굴을 돌아보며 쾌남아 주몽(朱蒙)의 자취를 꿈꾸었다.
「평양잡절송이무관」의 선연동은 칠성문(七星門) 밖에 있는 기생들의 공동묘지인 선연동에서 기녀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그렸다. 재치 있고 서정적인 표현을 하였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평양잡절송이무관」의 그밖의 시에는 봄날 능라도에서의 거나한 선유(船遊) 장면의 묘사, 기자(箕子)의 유제(遺制)로 전해지는 정전의 모습과, 아름다운 풍광으로 역대 시인 묵객의 발길을 묶었던 대동강변 연광정에 걸린 역대 시인들의 시판(詩板)을 둘러보며 느끼는 감회를 차례로 읊었다.
「평양잡절송이무관」과 비슷한 유형의 작품으로 「연경잡절(燕京雜絶)」 140수와 「심양잡절(瀋陽雜絶)」 7수 등이 있다. 이들 작품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특별히 작가의 역사의식이 드러남이 없다. 젊은 날의 낭만과 풍류가 두드러진다. 영·정조시대에 크게 성행을 보았던 악부시 창작의 영향을 받아 지었다. 비슷한 시기의 채제공(蔡濟恭)이 역시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의 역사 풍물을 장편 108수에 담아 노래하였던 「관서악부(關西樂府)」를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