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탈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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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1사단 및 제7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평양방어사령부를 격파하고 10월 19일 북한의 수도를 탈환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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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국군 제1사단 및 제7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평양방어사령부를 격파하고 10월 19일 북한의 수도를 탈환한 작전.
내용

38도선을 돌파한 이래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한 미 제1군단은 10월 17일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과 우익의 국군 제1사단이 황주∼율리선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미 제1군단은 10월 18일을 기하여 평양탈환을 목표로 포위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과 제8사단 그리고 제7사단이 원산∼평양 축선으로 서진하고 있었다. 즉 평양의 포위망은 남쪽 · 동남쪽 · 동쪽의 삼면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평양탈환이 임박할 무렵인 10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은 우리 국군이 먼저 점령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정일권 총장은 17일 국군 제2군단을 방문하여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2군단 예하 3개 사단 중 제7사단과 제8사단이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무렵 북한군은 평양방위사령부를 설치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방어하려 하였다. 평양방위사령부의 규모는 북한군 제17사단과 제32사단 소속의 잔류병 약 8,000명 정도였다.

평양탈환작전은 10월 18일에 포위망을 압축한 미 제1기병사단, 국군 제1사단, 그리고 국군 제2군단에 의해 전개되었다.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의 선봉부대가 동평양의 선교리 일대에서 상호 연결되어 진격하고 있을 때, 대동강 상류 쪽에서 도하하여 본평양을 위해 진격중인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와 국군 제2군단의 제7사단 제8연대가 있었다. 국군 제1사단은 10월 19일 제11연대와 제12연대가 동평양에, 그리고 제15연대가 본평양을 점령함으로써 사단에 부여된 세 가지의 주요 임무인 동평양탈환, 동평양의 2개 비행장 확보, 본평양의 배후 돌파 임무 등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10월 20일 10:00를 기해 평양시를 완전 장악하였고, 국군 제1사단에 뒤이어 미 제1기병사단도 대동강을 도하하였다. 한편 이 무렵 제2군단의 제7사단 제8연대도 대통령의 지시와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평양 공격부대로 선정되었다. 결국 북한의 수도인 평양의 탈환을 목표로 전개한 평양탈환작전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한 이래 만 11일 만에 국군 제1사단의 제11연대와 제12연대,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의 제5기병연대가 동평양을,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와 국군 제7사단 제8연대가 본평양을 각각 점령함으로써 종료하였다.

평가

평양탈환작전은 미군의 전진한계선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패주하는 북한군을 한만 국경선으로 추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6·25전쟁사 6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한국전쟁』中(국방군사연구소, 1996)
『한국전쟁전투사 -평양탈환작전』(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6)
집필자
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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