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경중(敬仲), 호는 퇴우(退憂). 표을충(表乙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표계(表繼)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표연말(表沿沫)이며, 어머니는 호군 이종림(李從林)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상관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 1515년 김안로(金安老)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정언, 이듬해 수찬에 이어 다시 정언이 되었다.
그 해 의정부·이조·예조·성균관을 통틀어 50명의 사유(師儒)를 간택하였는데 김안로·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이에 뽑혔으며, 노산군(魯山君: 단종)과 연산군의 후사를 세울 것을 진언하였다.
1517년 헌납이 되었고, 그뒤 교리를 거쳐 1520년에는 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장령·홍문관응교를 거쳐, 1523년 전한이 되어 응교를 겸하였다.
그 해 검상에 임명되었으나 경연(經筵)의 3품관이 5품직에 임명됨은 부당하다는 논란이 있었으며, 왜(倭)와의 싸움에서 패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패군지사추고경차관(敗軍之事推考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충청도에 다녀와 사인이 되었다. 1524년 다시 전한이 되었고, 이어 집의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