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는 미상이며, 왕경(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나마(奈麻) 취복(聚福)의 셋째 아들이다. 핍실의 두 형인 부과(夫果)와 취도(聚徒)는 앞서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 그 왕족인 안승(安勝)과 고구려 유민들의 일부를 금마저(金馬渚 : 지금의 益山)로 옮겨 거주시켰는데, 684년에 안승의 족자(族子) 대문(大文, 혹은 悉伏)과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문왕은 군사를 일으켜 핍실을 귀당제감(貴幢弟監)으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는 떠날 때에 아내에게 “우리 두 형은 이미 국사(國事)에 그 이름이 썩지 않고 전한다. 내가 비록 불초하지만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히 살 것인가. 오늘 그대와 살아서 헤어지지만 끝내는 죽어 이별하게 될 것이니 잘 살면서 슬퍼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도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였다.
그는 적진을 대하자 홀로 나가 분전하여 고구려군 수십인을 죽이고는 전사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신문왕은 이들 형제의 용맹에 탄복하여 이들에게 모두 사찬(沙飡)의 벼슬을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