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7년(숙종 33) 허봉의 증손 허지(許墀)가 편집하고 허사규(許士奎)가 교감하여 간행하였다. 원래 허봉의 동생 허균(許筠)이 1605년(선조 38) 간행하였으나 유실되어 새로이 종가(宗家)와 허목(許穆)의 집 등에서 수집하여 간행하였다.
4책.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곡시초』는 하곡선생시초(荷谷先生詩鈔)·보유(補遺)·속보유(續補遺)·잡저보유(雜著補遺)·조천기(朝天記) 3권·과강록(過江錄)·연보·목록 합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초’·‘보유’·‘속보유’에는 시 290여 수가 실려 있다. 「취가행증안백공(醉歌行贈安伯共)」, 「노서방가(盧書房歌)」, 「산자고사(山鷓鴣詞)」 등 가행(歌行)과 악부풍(樂府風)이 다수 실려 있고, 오언과 칠언의 율시, 오언과 칠언의 절구가 뒤를 이어 놓였다. 그의 시에는 중국 기행, 북변(北邊)으로의 유배, 금강산 기행 등 38세의 짧은 삶의 역정이 묻어나는 작품이 많다. ‘시초’·‘보유’ 끝에 1605년에 쓴 허균(許筠)의 발문이 있는데 허균이 먼저 104수의 시를 뽑아 ‘시초’를 엮고 나머지는 ‘보유’에 넣었다고 하였다. ‘속보유’에도 53수의 시가 더 실려 있다.
시 가운데 「감우(感遇)」는 『열조시집(列朝詩集)』에 뽑혀 있으나 본집에는 들어 있지 않은 작품이다. 허봉의 시는 가행(歌行)이나 악부풍(樂府風)이 강한 것이 많다. 「낭천염곡(狼川艶曲)」 등의 작품에서는 이별의 슬픔을 곡진히 그려내고 있다.
‘잡저보유’에는 「선산봉고인사증민상인(仙山逢故人辭贈敏上人)」·「대행왕대비애책문(大行王大妃哀冊文)」, 제문 4편, 묘지·묘비명 각 1편, 기(記) 3편, 제발 2편, 설(說) 1편, 서(書) 12편이 실려 있다. 「강선루기(降仙樓記)」는 1582년 원접사 서장관으로 다녀오면서 고경명(高敬命)·한호(韓濩)·최립(崔岦)·이덕원(李德源) 등과 함께 들렀던 성천(成川)의 강선루를 놓고 지은 글이고, 「국도기(國島記)」는 1585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면서 들렀던 아주(安邊)의 국도(國島)를 놓고 지은 글이다. 「제양송첩후(題養松帖後)」는 천기(天機)라는 용어로 그림을 평한 글이다. 「제두율권후봉정매씨난설헌(題杜律卷後奉呈妹氏蘭雪軒)」은 『두율우주(杜律虞註)』와 다른 소보(邵寶)의 두시(杜詩) 주해서도 성행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조천기」는 1574년 허봉이 서장관으로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을 수행하여 중국에 다녀온 기행문이다. 원지산인(遠志山人) 유성룡(柳成龍)의 서가 붙어 있다. 일기체로 쓰인 이 글은 1574년(선조 7) 5월 11일부터 6월 29일까지의 행록이 상권에 담겨 있고, 7월 1일부터 8월 30일까지의 행록이 중권에 담겨 있으며,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의 행록이 하권에 담겨 있다.
「조천기」는 기상과 노정, 당대 조중외교사의 쟁점이나 경제구조, 지리 등의 제반 사실이 매우 자세히 적혀 있어 자료 가치가 크며,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기행문학 작품이다. 끝에 유성룡(柳成龍)과 허봉 자신의 발이 그 뒤에 허균이 만든 연보가 있고, 목록이 맨 뒤에 실려 있다. 권미에는 1707년에 쓴 허지(許墀)의 발문이 있다.
「과강록」은 「조천기」가 끝난 다음인 그 해 10월 10일부터 11월 3일까지의 기록이다.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노정에 관한 것이다. 끝에 자지(自識)가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