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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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개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는 비영리적이고 실험성이 강한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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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는 비영리적이고 실험성이 강한 연극.
내용

상업극과는 달리 비영리적이고 실험성이 강한 문화운동이다. 학생연극운동은 2·8독립선언 다음해인 1920년 봄부터 출발하였다. 동경유학생 김우진(金祐鎭)·홍해성(洪海星)·조명희(趙明熙) 등 20여 명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 연극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극예술협회라는 연극 연구단체를 조직하고, 셰익스피어·괴테 등 서구의 고전극과 근대극 작품들을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서구의 고전극과 근대극을 연구하다가 동경에 있는 한국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同友會)의 요청으로 극단을 조직하였다. 그 목적은 전국순회공연을 통하여 실제 무대에서 자기들의 연극운동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와 고학생 구제라는 두 가지였고, 명칭은 그대로 동우회로 하였다.

동우회 순회극단활동이 신파극단만 있던 국내 연극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면서 성공을 거두자, 같은 해 서울에서 고학생들로 조직된 갈돕회가 등장하였고, 동경에서는 개성청년들이 송경학우회를, 1922년에는 동경유학생들이 형설회를 만들었다. 형설회·송경학우회·갈돕회 등도 동우회와 마찬가지로 주로 방학을 이용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는데, 이들의 활동은 강연·음악연주·연극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강연의 주목적은 민중계몽, 설득이었고, 음악은 민중위로였으며, 연극은 예술적으로 민중을 계도하자는 것이었다. 이들이 공연한 작품들은 거의가 근대의식을 담은 시대비판적인 창작사회극과 서양의 근대극이었다. 1920년대 연극의 주류를 형성하였던 토월회도 박승희(朴勝喜)·김기진(金基鎭)·이서구(李瑞求) 등 동경유학생들이 만든 학생극단체로부터 출발하였다.

나중에 기성극단으로 성장한 토월회를 제외한 수십 개의 다른 학생극단들이 비록 단명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이 남긴 공적은 몇 가지 점에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첫째로는 1920년대 초의 학생극은 신파극으로 출발한 한국연극사에서 정통적 신극, 즉 서구 근대극의 씨앗을 이 땅에 처음 뿌린 것이고, 둘째로는 일제의 억압과 착취로 신음하는 어리석은 민중을 계몽하고 위로하였으며 용기를 주었다는 것, 셋째로는 어려운 시기에 처하였을 때 학생운동을 전개하는 방법을 제시하였고, 개화기에 문화선양활동을 효과적으로 하였다는 점 등이다. 또한 이들 학생극운동은 사회로부터 많은 성원과 호응·찬사를 받았다.

역사에 대한 조응과 그 거부반응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던 초기의 학생연극운동은 최초의 정통적 신극운동을 시작하였고, 1920년대 후반에는 각급학교에 극회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연극을 한 학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서 1927년 2월에 마테를링크(Maeterlinck,M.)의 <파랑새>를 상연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12월에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쇼(Shaw,G.B.)의 <성 잔다르크>를 상연하였다. 또한 보성전문학교·혜화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이 속속 학교극회를 발족시켰으며, 1920년대말에는 이들 전문학교들이 연극콩쿠르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학생극운동을 벌였다. 1930년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홍해성 연출로 막을 올린 체호프(Chekhov,A.P.)의 <벚꽃동산>은 그때까지 기성극단들도 엄두를 못낸 대작으로서 신극사(新劇史)에서 신기원을 이루었던 공연이었다.

1920년대 초 학생극이 정통 신극운동을 처음 시도하였다면, 1920년대말의 학교극은 1930년대에 올 본격적인 근대극운동을 예시하여준 것이다. 1930년대의 학생극운동은 더욱 활발하고 다양하게 전개되는데, 1920년대말쯤에 생긴 학교 이외에도 근화여학교·경성보육녹양회·배재학교·여자의학강습소·경성여자기독청년회 등이 극회를 만들어 연극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학생극단체는 1934년 동경에서 이해랑(李海浪)·박동근(朴東根) 등 15명이 창립한 동경학생예술좌라고 하겠다. 이 극단은 민족의 얼을 기리고 좌익극과 대결하여 우수한 연극기술자 양성을 목적으로 발족되었는데, 기성극단보다도 더욱 강력한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연구활동·공연활동·출판활동 등 다양한 활동으로 전문적이고 본격적인 연극운동을 펼쳐 나갔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라는 이념 아래 유치진(柳致眞) 작 <소>(3막)와 주영섭(朱永涉) 작 <나무>(1막)를 가지고 1935년 일본 신극의 요람인 쓰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에서 창립공연을 가졌는데 재일동포와 유학생들의 절찬을 받았으며, 제2회 공연인 <춘향전>(유치진 작 4막 5장)은 더욱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자 일제의 태평양전쟁확대와 강압정책으로 더 이상 공연활동을 계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광복 전까지 동경학생예술좌만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조직적이고 학구적이며 순수하고 많은 공적을 남긴 학생극 단체는 연극사상 없었다. 그만큼 동경학생예술좌는 학생극단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학생극운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개화기 이후 8·15광복 전까지만 해도 한국예술인들은 후진국에다가 식민지라는 역사적 상황 때문에 그들의 예술운동을 민족주의와 이상주의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결국, 그들이 항상 내걸었던 개화니 계몽이니 자주니 하는 것도 결국 그와 같은 공동의식 바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학생극운동도 그러한 민족주의나 이상주의라는 차원에서 개화, 계몽되는 즉, 궁극의 목표는 민족의 자유독립에 있었다. 문화선양이라든지 민족의 정서함양 같은 것도 모두가 자주독립에 귀결되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광복 직후의 학생극운동도 일제강점기의 학생극운동과 그 본질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광복 후 첫 학생극 활동은 1946년 3월에 경성대학과 법학전문학교 등 시내 12개 대학이 합동공연으로 류가쿠칸슈진(笠鶴觀主人) 작 <3월 1일>(3막 8장)을 서울극장에서 상연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5월에는 보성전문학교가, 6월에는 서울대학교가 창립공연을 가졌고, 6월중에는 일부 학생극 회원들이 브나로드운동(계몽운동)에 참가하여 남한 일대를 순회공연하였다. 그 목적은 민주주의의 계몽에 있었다.

광복 직후의 학생극 운동이 그 본질에 있어 일제강점기와 동궤였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애국운동에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차 학생극의 방향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의 각 단과대학이 통합하여 국립대학극장을 설립하면서 그 설립취지를 ‘좋은 예술인의 양성’이라고 밝힌 데서도 잘 나타나듯이, 기성연극운동이 반일민족운동에서 좌우익의 사상싸움에 휘말려 들어간 데 비해, 학생극운동은 될 수 있는 대로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초연하려 노력하면서, 우수한 연극인 배출이라는 현실적 생각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국립대학극장은 창립공연으로 체호프의 <악로>를 시공관에서 가졌고, 이화여자대학교가 배리(Barrie,J.M.)의 <퀄리티 스트리트 Quality Street>(4막)로 제1회 공연을 가졌으며,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성균관대학이 각각 강준상(姜駿相) 작 <생의 제전>, 안영일(安英一) 각색의 <아름다운 청춘>으로 창립공연을 하였다. 서울의 주요 대학들이 1946년과 1947년, 그리고 1948년에 각각 창립공연을 가지고 연극활동을 펴나갔다.

1949년 10월 한국연극학회주최 제1회 전국대학극경연대회가 열려서 서울대학교 등 9개 대학이 참가하였는데, 이것은 광복 직후 학생극운동의 절정을 이루는 행사였다. 그러나 학생극은 틀을 잡는 듯하다가 1950년 6·25전쟁을 만나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고, 사변이 끝날 때까지 학생극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유치진이 다시 주도한 대학극경연대회를 계기로 하여 학생극은 다시 활발하여지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초에 걸쳐 서라벌예술대학·중앙대학·동국대학·한양대학 등에 연극학과가 생기면서 학생극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6·25전쟁 이후의 학생극운동은 그 본질에 있어 일제강점기나 광복 직후의 학생극과 다른 것이었다.

전후의 학생극운동의 주제는 민족운동이라는 종래의 성격을 벗어나 기성연극이 그렇듯 오직 극예술의 추구와 그 구현에 있었다. 따라서 학생극은 전처럼 생동적이거나 과감한 실험성을 잃고 기성연극을 모방하는 데 급급하였으며, 기성연극처럼 철따라 연례행사처럼 연극행사를 치르는 데 그쳤다. 그래서 학생극은 뚜렷한 목표나 방향을 잃고 학교극으로서 연극인의 배출이라는 의의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65년대 중반부터 학생극운동은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강한 사회성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곧 사회비판을 의미하는 데, 서울대학교 등 일부 대학극은 공연이 중단되거나 작품이 학교측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하는 수난도 당하게 되었다. 둘째, 실험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9년 연출가 유덕형(柳德馨)이 시도한 동서연극의 융화, 즉 아르토(Artaud,A.)·그로토우스키(Grotowski,J.) 이래 종래의 화술극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주창하였던 대로 동작중심의 연극으로 변모시켜보려는 새로운 실험극이 학생극에까지 파급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전통극에 대한 탐구와 열의이다. 서울대학교 가면극연구회를 시발로 하여 고려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서강대학교 등 많은 대학들이 민속극회를 조직하고, 민속극의 연구조사와 전승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이후 우리 것을 알고 찾자는 주체성과 정치체제에 대한 우회적 비판현상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전통극 탐구는 학생극운동 50년 사상 가장 고무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극이 현대에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며, 한국연극이 어떻게 가야 하는가 하는 것과 관련하여 학생극의 전통극에 대한 관심이 주목된다. 이처럼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학생극운동은 다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어가며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 대학극에서 저항적 색채는 많이 줄어든 듯이 보이지만, 그 정열은 전통극 연구와 공연으로 해갈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는 각 대학의 단과대학이나 문과대학의 각 학과들이 다투어 학과행사로 연극을 할 만큼 보편화되어있다. 1920년 초부터 시작된 대학극은 70여 년의 전통을 가지고 처음으로 이 땅에 서구적 리얼리즘 연극을 이식하였으며, 항일민족운동으로서의 연극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성사회와 흥행적인 상업주의에 반항하면서 새로운 사조를 도입하는 등 기성연극계에 신선한 자극과 활력을 주었다.

또한 광복 이후로 많은 전문 연극인을 배출하였으며, 제작극회·실험극장 등의 극단을 배태하였다. 그리고 전통극에 대한 탐구로서 전통극의 계승과 현대적 수용 및 마당극의 정립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학극은 연구적이고 실험적이며, 참신하여야 한다. 안이한 연출목록 선정, 미숙한 연기, 비틀린 기성극 모방은 대학극이 지양해야 할 하나의 과제이다.

참고문헌

『한국신극사연구(韓國新劇史硏究)』(이두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6)
『한국연극산고(韓國演劇散考)』(류민영, 문예비평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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