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7월에 예조판서 윤근수(尹根壽)와 공조판서 한응인(韓應寅), 어어서 8월에는 이덕형(李德馨)을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하였는데 그때마다 통역관으로 동행하였다.
그 해 평양 탈환전에서 패전한 명장(明將) 조승훈(祖承訓)이 귀국하여 패전의 책임을 조선측에 전가함에 이의 진상을 해명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갔다.
이때 명나라의 순안어사(巡按御史)는 조선 군사들이 왜적에게 투항하여 명군에게 작전상 차질을 주었으며 명군의 군량과 마두(馬豆)를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 인마(人馬)를 죽도록 한 데 대하여 힐책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그동안의 곡절을 겸허하게 해명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조승훈의 보고가 허위임을 납득하게 하여 조선 측의 큰 걱정거리를 해결하였다.
1593년(선조 26) 2월 접반사(接伴使) 한응인, 8월에는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역관으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98년에는 명장 진린(陳璘)의 차비역관(差備譯官)이 되었다. 임진왜란 중 우리 나라에 원병 온 명군과의 외교관계에 역관으로서 큰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