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7월 함흥 중리(中里) 천도교당 교구당에서 김신원(金信遠)·고탑(高塔)·고순욱(高舜旭)·고신균(高信均)·안호필(安鎬弼)·주길찬(朱吉燦)·한각영(韓恪泳)·조영성(趙永星)·김경식(金慶植)·안증현(安增鉉) 외 70여명이 평양에서 온 이홍근(李弘根)의 사회 아래 조직하였다.
1925년부터 1928년 사이에 함흥에서 조직된 무정부주의운동 단체인 함흥자연과학연구회(咸興自然科學硏究會)와 함흥소년회(咸興少年會)와 서로 연관이 되어 무정부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단체의 주도세력들의 대다수는 함흥고등보통학교(咸興高等普通學校) 출신들이었다. 1928년 9월 함흥고등보통학교 교내서클을 움직여 식민지교육 반대투쟁으로서 함흥고등보통학교 맹휴를 일으켰는데, 주동자는 이봉재(李鳳在)·이봉익(李鳳翼)·장현직(張鉉稷)이었다.
1931년 3월 함흥고등보통학교 교내에서 무정부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의 학생들간에 충돌이 일어나 10여명이 피검되었고, 1933년 5월에 재차 교내에서 난투극이 벌어져 2명의 중상자를 내고 17명이 검사국(檢事局)에 송치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