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후기, 창고에 쌓여 있어야 할 환곡(還穀)은 없고 문서상으로는 실제로 있는 것처럼 거짓 기록만 남아 있는 것.
내용
조선시대의 지방관은 세금 징수에 대한 책임이 있었고, 정해진 기한 내에 징수를 완료하지 못하면 처벌을 받았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상평청에서도 환곡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환곡의 액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약 1,000만석으로 환곡의 액수가 급증하였다.
환곡 총액이 증가함에 따라 지방관이 실제로는 거두지 못하였음에도 징수하였다고 허위 보고하는 행위도 증가하였다. 지방관의 이런 행위는 흉년이라든지 긴급한 일로 창고의 재원을 사용하려고 할 때에 발각되었다.
환곡을 제대로 징수하지 못한 수령을 처벌하는 규정은 1698년(숙종 24)에 편찬된 『수교집록(受敎輯錄)』에서부터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이르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녹봉(祿俸)과 해유(解由)에 얽매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볼기를 맞는다거나 잡아다가 심문하기도 하는 등 점차 그 규정이 강화되었다.
환곡을 제대로 징수하지 못한 지방관의 처벌 규정이 강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환곡 징수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지방관은 가을에 환곡을 징수하지 못하였지만 징수하였다고 보고하고는, 다음 해 봄에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지도 않고 분급한 것으로 거짓 문서를 작성하여 보고하기도 하였다. 이런 행위를 번작(反作)이라고 한다. 지방관의 환곡 징수의 부정 행위가 또 다른 부정 행위를 초래하고 있었다.
환곡은 흉년이 들었을 때나 환곡을 받은 사람이 사망하면 징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왕조 정부에서는 때때로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탕감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관이 허록한 것은 장부상에는 징수한 것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탕감에 포함될 수 없었다.
변천 사항
참고문헌
원전
- 『대전회통(大典會通)』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수교집록(受敎輯錄)』
단행본
-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경인문화사, 2000)
- 정약용 저, 다산연구회 역주, 『역주 목민심서』(창작과비평사, 1981)
논문
- 송찬섭, 「조선조 18~19세기 경상도지역 환곡운영의 변동」(『역사교육』 101, 역사교육연구회, 2007)
- 오일주, 「조선후기 재정구조의 변동과 환곡의 부세화」(『실학사상연구』 3, 모악실학회, 1992)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한국사론』 2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9)
인터넷 자료
- 『조선왕조실록사전』(http://dh.aks.ac.kr/sillokwiki)
주석
-
주1
: 환자(還子)를 받을 때, 곡식을 쌓아 둘 동안 축이 날 것을 미리 셈하여 한 섬에 몇 되씩 덧붙여 받던 곡식.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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