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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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철
현철
연극
인물
일제강점기 「소설개요」, 「소설연구법」, 「희곡의 개요」 등을 저술한 연극인. 번역가.
이칭
현당(玄堂), 해암(海巖)
이칭
효종(曉鍾), 효종생(曉鍾生), 세류옹(世瘤翁), 해암(海巖), 세류옹(世瘤翁)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1년(고종 28)
사망 연도
1965년
출생지
부산광역시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소설개요」, 「소설연구법」, 「희곡의 개요」 등을 저술한 연극인. 번역가.
개설

본명은 희운(僖運). 필명은 현당(玄堂) · 효종(曉鍾) · 효종생(曉鍾生) · 세류옹(世瘤翁) · 해암(海巖). 부산 출신. 개화기에 일본어 역관을 지낼 만큼 매우 개화가 빠른 집안 출신이었다. 1911년보성중학(普成中學)을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처음에는 의학공부에 뜻을 두었으나 “민족적 의력(醫力)이 발달되지 못한 나라는 연극이 발달되지 못하였다.”는 어느 책 구절을 읽고 감분[感奮:감격하여 분발함]된 바 있어, 민족의 의력을 찾고자 연극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13년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 재학중 일본 신극의 선구자 시마무라(島村抱月)가 경영하는 게이주쓰좌(藝術座) 부속연극학교로 적을 옮겼다.

시마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예술좌의 관서지방 공연에 연구생으로 따라나선 것이 연극공부의 시작이었다. 그 해 12월데이코쿠극장(帝國劇場)에서 상연한 예술좌의 <살로메>에 단역으로 처음 출연하였다.

이어 1914년에 입센(Ibsen,H.J.)의 <바다의 부인>, 체호프(Chekhov,A.P.)의 <곰>, 톨스토이(Tolstoi,L.N.)의 <부활>, 나카무라(中村吉藏)의 <조소 嘲笑>, 주더만(Sudermann,H.)의 <고향>, 1915년 투르게네프(Turgenev,I.S.)의 <그 전야(前夜)>, 나카무라의 <반 飯> 등에 계속해서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1917년 연극학교를 마치고 귀국하였으나, 적어도 새로운 연극운동을 일으키려면 중국의 경우를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중국의 신극배우 오우양셰첸(歐陽豫倩)을 알게 되었고, 그가 주재하는 싱지연극학교(星綺演劇學校)를 견학하면서 돕기도 하였다.

그 뒤 1919년 2월 귀국하여 1920년 2월 서울 서대문 근처에 예술학원(藝術學院)을 설립, 연극반과 무용반을 두고 연극인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 종합잡지인 ≪개벽 開闢≫이 창간되자 학예부장으로 들어간 그는 왕성한 필력을 발휘하는데, 희곡론에서부터 소설론 · 연극론 · 문화시론에 이르기까지 수십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때의 글 중 대표적인 것은 <소설개요> · <소설연구법> · <소위 신시형과 몽룡체> · <문학에 표현되는 감정> · <연극과 오인의 관계> · <희곡개요> · <현당극담> · <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 · <비평을 알고 비평을 하라> 등이다.

그 뒤 예술학원이 내분으로 1년도 못 가서 문을 닫고 말자, 1923년 10월 민중극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벌이기 위해 동국문화협회(東國文化協會)를 발족하고 이듬해 12월 조선배우학교 설립에 착수하였다. 처음에는 종로구 와룡동 소재 변사 김덕경(金德經)의 집 2층을 빌려 시작하였으며, 1925년 2월에 창신동으로 이사하였다.

당시 “한국사람의 형편으로서는 문화사업에서 제일 급한 것이 의지력을 기르는 것과 인간을 알게 하는 것이고, 의지력을 배양하는 것과 인간을 알게 하는 것은 연극사업이다.”라는 취지 밑에 동국문화협회와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한 1년 만인 1926년 2월에 제1기생을 졸업시켰다.

같은 해 9월 입센의 <인형의 집>으로 시연회를 열고 졸업생으로 극계현문까지 형성하려 하였으나, 조선배우학교도 결국 내분으로 1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조선일보 기자생활도 하였고, 1927년 6월부터는 몇 달 동안 조선극장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34년 5월에는 박승희(朴勝喜)와 함께 토월회(土月會) 후신인 태양극장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곧 포기하고, 창극진흥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한때 그는 화장품 제조에도 손을 댄 적이 있다. 광복 후 동국문화협회를 통하여 ≪한국 급 한국인≫이라는 잡지를 발간한 적이 있으며, 배우학원을 다시 열었으나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말년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화접리에서 쓸쓸하게 보냈다.

그는 단역배우로 출발해서 최초의 연극학교를 세웠으며, 3·1운동 직후 외국문화사조와 외국작가 및 작품, 문학 · 연극 이론을 소개, 번역한 선구자였다. 번역작품으로는 투르게네프의 <그 전야>를 비롯하여 셰익스피어(Shakespeare,W.)의 <햄릿>을 최초로 소개하였고, 입센과 독일의 표현주의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도 그였다.

그것이 비록 일본을 통한 간접 소개였다고 하더라도 표현주의 소개는 대단히 앞선 생각이었다. 그는 또 극작가이기도 하였다. 비록 희곡은 모작의 성격을 띤 단막극 <견> 한 편이지만, 초창기에 그와 같은 사실적 작품을 썼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최대업적은 문학론과 연극론의 전개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개벽≫에 발표한 <소설개요>와 <소설연구법>은 우리 나라에서 소설의 이론을 체계화하여 논의한 최초의 이론으로, 개화기에 단편적으로 소설을 이야기한 이해조(李海朝)나 김동인(金東仁)보다 더욱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소설론을 전개하였다.

희곡이론과 연극론은 더욱 뛰어난데, <희곡의 개요>에서는 희곡의 구조를 설명하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로부터 프라이타크(Freytag,G.)에 이르는 서양의 희곡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 밖에도 여러 편의 글을 통해서 계몽운동에서 연극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문학비평이라든가 문예사상론을 펴서 민중계도에 앞장섰다. 특히 민중극운동을 제창하여 롤랑(Rolland,R.)처럼 민중의 의력을 일으키려 한 것은 주목된다. 그는 우리 나라 근대연극사상 신파극으로부터 정통적인 근대극으로 넘어가는 데 징검다리 구실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신극사연구(韓國新劇史硏究)』(이두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6)
『한국문학의 비교문학적 연구』(김학동, 일조각, 1972)
「현철(玄哲)연구」 Ⅰ∼Ⅲ(정덕준, 『한국연극』, 한국연극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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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유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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