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 아버지는 홍온(洪昷)이며, 어머니는 군수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 1571년(선조 4) 강릉참봉(康陵參奉)이 되었을 때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특진되고 이어 형조좌랑·지평을 거쳐 1584년 안산군수를 지냈다.
1588년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구황(救荒)의 공이 있어 표창을 받았으나 평소에 정여립(鄭汝立)과 가까이 지낸 이유로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 때 파직 당하였다.
1593년 파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홍주목사로 부임해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해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강화부사·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을 지내고, 1604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초 장례원정·한성부우윤 겸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1610년 형조판서에 이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아산에서 죽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주로 사문(師門)의 촉망을 받았으며, 체계있는 학문을 전수받아 문장으로서 조직적인 화실(華實)의 매력을 갖춘 외에 성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문(斯文)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이기(理氣)의 본질을 우주의 본질로서 간파해 기와 이로 보고, 기와 이의 순환 과정에서 만물이 생성하며 음양으로 조화, 분리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동조하였다.
또한 생사분리(生死分離)를 주장하는 노자철학과 인간 생명을 허무적멸(虛無寂滅)로 떨어뜨리는 불교관을 배척하였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봉안되어 있다. 저서로는 『만전집(晚全集)』과 『만전당만록』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