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일휴(日休), 호는 마천(麻川). 홍주(洪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징(洪徵), 할머니는 염제신(廉悌臣)의 딸이며 아버지는 절도사 홍상직(洪尙直), 어머니는 남평문씨(南平文氏)이다.
1442년(세종 24) 한학훈도(漢學訓導)로 재직 중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돈녕부부승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강이관(講肄官)으로서 여러 해에 걸쳐 한어(漢語) 강습에 전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장(杖) 80의 형을 치르고 파직되었다.
그 뒤 세종 말에서부터 문종 초에 우정언을 지냈다. 1453년(단종 1) 선공감판관, 이듬해 개천군사(价川郡事)를 지낸 다음, 1454년 좌헌납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주부로 재직중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57년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로서 사은사압물관(謝恩使押物官)이 된 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사행중에 무단히 귀환해 중시에 응시했고, 응시한 뒤에는 아뢰지 않고 귀임했으며, 급제한 뒤에는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그대로 명나라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돌아갔다는 이유로 지평 김기(金琦)의 탄핵을 받았으나 용서되었다.
1459년 판승문원사 재직중에 칙서의 내용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461년 호조참판으로서 하성절 및 천추사(賀聖節及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또한 이듬 해에도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3년 행상호군이 되고, 명승지를 유람시키라는 세조의 명을 받아 선위사(宣慰使)의 직함을 띠고 유람하던 중 홍주에서 과음해 사망하였다. 성품이 호방하고 소탈했으며, 시와 풀피리에 능해 명성이 있었다. 저서로는 『마천집(麻川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