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구는 그림을 그리는 데 쓰이는 재료와 미술도구이다. 동양화에서 화구의 개념은 제작에 필요한 도구로서의 단순한 물질 개념 이상의 정신 영역까지를 포괄한다. 동양화의 화구는 소모품인 채색 안료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종이, 붓, 벼루, 먹의 4가지가 가장 기본이다. 서양에서 미술의 재료는 시대에 따라서 많이 변화한다. 미술 재료는 미술의 사회적인 수요와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고 그 물질을 재료로 응용하는 등의 변화가 있어 왔다. 현대에 와서 전통적 화구의 생산과 수요는 전에 비해 위축된 상태이다.
동양화에 있어서 화구(畵具)의 개념은 제작에 필요한 도구로서의 단순한 물질 개념 이상의 정신 영역까지를 포괄하여 관련짓는 것이 특징이다. ‘문방사우(文房四友)’나 ‘문방사보(文房四寶)’ 등과 같이 의인화하고 인격화함으로써 화구에 대한 독특한 경념(敬念)을 나타냈으며, 이와 결부되어 많은 화법 · 화론 · 미학이 발생되었다. 즉 화구는 물성(物性) 그 자체뿐 아니라 독특한 재료의 음양관(陰陽觀)에 입각하여 외경스럽게 다루어졌다. 이는 작가의 고유한 인품이나 정신이 주로 화구의 운용과 그 효율성에 의해 작품에 반영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서양에서도 그림뿐 아니라 미술의 재료가 시대에 따라서 많은 변천상을 보인다. 고대 그리스 · 로마시대에는 주로 벽화를 제작했기 때문에 회벽(灰壁)에 안료로 직접 그리거나 또는 모자이크같이 색이 있는 잔돌을 써서 평면을 메워 표현하기도 하였다. 중세, 특히 고딕시대에는 창이 많은 고딕 건축을 장식하기 위하여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색유리로 화면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엄격한 의미의 화구가 나타난 것은 르네상스 이후 화폭, 즉 캔버스나 판자와 같이 이동할 수 있는 재료를 써서 그림을 그리면서부터이다. 모자이크나 프레스코 벽화, 스테인드글라스 등은 움직일 수 없는 부동적인 평면 표현인 데 비하여 르네상스 이후의 캔버스나 판자 그림은 움직일 수 있는 그림이 되었다는 것이 커다란 변혁이다. 이와 같이 회화가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부터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달라진 것은 크게는 시대 환경, 즉 시민정신의 발현과 세속화에 따른 변화이다. 종래 종교적인 목적에 봉사하던 그림이 인간적인, 세속적인 목적으로 제작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서 그림의 크기가 소형화되고, 그림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야 하는 목적에 순응하게 된 것이다.
유화(油畵) 재료의 발명은 르네상스기의 반 에이크(van Eyck) 형제의 공덕이라 하지만, 사실상 14세기 이후의 모든 화가는 자기가 사용하는 유화 물감을 자기의 손으로 만들어 쓰고 있었다. 동물성 · 광물성 · 식물성에서 얻은 물감을 기름에 갠 다음 건조제를 섞어 쓴 것이 바로 그림 물감의 시초이다. 그와 더불어 그려지는 바탕이 베 헝겊, 즉 캔버스와 판자 또는 종이로 바뀌면서 회화의 가동성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화구’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그림의 도구라는 의미이지만,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술 재료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이 미술 재료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술의 사회적인 수요에 따라서 여러 가지 변모를 가져온다. 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미술 재료가 변모하고 발전해 왔다는 사실이다. 자연과학의 발달은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고 그 물질이 미술 재료로 응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서양의 경우 그림 재료를 크게 나누면, 유채와 수채로 구분되지만 유채는 물감을 기름에 갠 것이고 수채는 물감을 물에 갠 것이다. 그것을 캔버스나 판자, 종이 바탕에 사용하면 그림이 되는 것이다. 또 벽에다 그리는 벽화도 있지만, 최근에는 제작 빈도가 그리 높지 않다.
판화의 경우 그것을 파는 재료로 동판 · 목판 · 지판 등이 있지만, 형상을 뜨는 것은 전부 종이이다. 화구라는 개념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에는 화가(畵架)도 있다. 이것은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나 화판을 놓는 다리가 붙은 대로서 실내용과 야외용이 있다.
액자(frame)도 중요한 화구로서 그림을 주변 환경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또 화면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바로크시대 그림을 이동할 때부터 생겨났다. 화판(board)은 수채화를 그릴 때 수채화 용지를 붙여서 쓰는 회화 재료이다. 화포(캔버스)는 그림을 그리는 천으로서 화포의 표면이 거친 것과 부드러운 것으로 구별된다.
그 밖에도 건조 화구 · 건성류 · 건성재 등이 있다. 건성류는 물감을 개는 기름으로 공기의 접촉으로 산화하여 마르고 그림물감을 굳히는 구실을 한다. 건조재 역시 그림물감에 섞어서 그림을 빨리 건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하면 변색과 균열을 일으킨다.
동양화의 화구는 소모품인 채색 안료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종이[紙], 붓[筆], 벼루[硯], 먹[墨]의 4가지가 가장 기본적이고 전통이 깊다. 그 밖에 연적(硯滴), 화포(畵布), 문진(文鎭) 등이 있다. 또 붓발[筆卷], 필산(筆山), 필가(筆架), 묵대(墨臺), 묵병(墨屛) 등도 있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 위에 작가가 성명이나 아호, 혹은 좋은 시구(詩句)나 글 등을 새겨 찍는 인장(印章), 인장을 화지 위에 바르게 찍기 위한 곡척(曲尺) · 인척(印尺), 인니(印泥)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인합(印盒) 등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인장 찍는 것을 낙성관지(落成款識), 혹은 낙관(落款)한다고 하는데, 작가의 서명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인재(印材)로는 동물의 뼈와 옥돌, 금, 은, 철, 도기류, 목재(木材), 죽근(竹根) 등이 폭넓게 쓰이나 석인(石印)이 가장 흔하다. 도법(刀法)에 따라 백문(白文)이라고 부르는 음각법과 주문(朱文)이라고 부르는 양각법으로 대별된다. 인합에 담기는 인니만 하더라도 주종인 주색(朱色)에는 황구와 적구가 있고 청인니(靑印泥), 묵인니(墨印泥) 등 다양하다. 그 밖에 필통(筆筒), 필세(筆洗) 등이 있다.
화구를 종류별로 살펴보면, ① 종이 : 그 산지와 용도에 따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화용지인 선지(宣紙)만 하더라도, 단선(單宣), 협선(夾宣), 자추전(煮皺箋), 옥판선(玉版宣), 나문선(羅文宣), 귀갑선(龜甲宣), 호피선(虎皮宣), 냉금선(冷金宣), 선의전(蟬衣箋), 방고전(防古箋), 납전(蠟箋), 당지(唐紙), 시전(詩箋)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같은 선지 계통이면서도 한지, 중국지, 일본지가 달라서, 예를 들면 일본지의 경우 조자지(鳥子紙), 안피지(雁皮紙), 봉서지(奉書紙), 마지(麻紙), 단지(檀紙), 요지(料紙), 미농지(美濃紙)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화지는 펄프의 산지에 따라 남지(南紙)와 북지(北紙)로 나눈다. 대체로 종이의 결이 세로로 되어 있는 남지 계통에 금방(金榜), 노옥(潞玉), 백록(白鹿), 화심(畵心), 옥판(玉版), 선의(蟬衣), 냉금선, 나문(羅文) 등이 포함되고 양질에 속한다. 북지는 무늬가 가로로 되어 있고, 지질이 두꺼우며 거칠다. 천장(千張), 화지(火紙), 하포(下包)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밖에 경서를 베끼는 데 주로 썼던 당지가 있다. 이는 경황지(硬黃紙)로서 당나라 때 좀먹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황벽(黃蘗)으로 물들인 것이다. 등백지(藤白紙), 죽지(竹紙), 대전지(大箋紙), 채색분전(彩色粉箋), 관음지(觀音紙) 등 목재와 펄프의 후박(厚薄) 정도, 재료의 전피(全皮), 반피(半皮), 칠피(七皮)의 구분 정도와 길이의 장단에 따라 구별하며, 색채에 따른 구별도 있어 매우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지료(紙料)는 크게 3종이 있는데, 저(楮) 계통과 죽(竹) 계통과 초(草) 계통이 그것이다. 화지는 중국에서 만들어졌는데, 특히 종이가 발달하였던 시기는 청나라 초기로서 이 때는 출판 · 인쇄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방징심당지(彷澄心堂紙), 방금률산장경지(彷金栗山藏經紙) 등 당대 · 송대 · 원대의 종이를 복원, 모방하여 대량 생산하기도 하였다. 중국역사상 가장 양질의 종이는 송대에 널리 쓰인 징심당지이고, 오늘날까지 널리 쓰이는 화지로는 오당지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지라고 부르는 단단하고 질긴 종이가 많이 쓰였고, 민간에서는 두껍고 질긴 장지류(壯紙類)가 많이 만들어졌다. 채색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민화는 대체로 이 장지에 그려졌다.
일본의 종이인 화지(和紙)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달리 색지(色紙)가 많이 발달하였다. 안료의 침투 정도에 따라 같은 붉은색 계통이라도 도지(桃紙), 홍지(紅紙, 薄紅 · 深紅), 자지(紫紙, 赤紫 · 墨紫 · 滅紫) 등으로 나누어졌다. 특히 남색 계통과 홍색 계통이 발달하였다. 일찍부터 염지 기술(染紙技術)이 발달하였고 얇고 부드러운 미농지가 널리 보급되어 하도용지(下圖用紙) 및 일반 용지로 쓰이기도 하였다.
② 붓 : 모필은 호(毫)의 종류에 따라 양호(羊毫), 낭호(狼毫), 석서(石鼠), 황모(黃毛), 저모(猪毛), 치모(雉毛), 압모(鴨毛), 녹모(鹿毛) 등으로 분류된다. 필관의 종류에 따라서는 목필(木筆), 죽사필(竹絲筆), 형필(荊筆) 등으로 나누어진다. 또 길이에 따라서는 장봉(長鋒), 장관(長管), 단봉(短鋒), 조필(粗筆) 등으로 구별해서 부른다.
형태와 용도에 따라 사군자용, 산수화용, 채색필, 초상면상필(肖像面相筆), 장식필, 편필, 애완필 등으로 분류된다. 그런가 하면 기필(奇筆)이라 하여 실제 제작에 사용하지 않는 학우모필(鶴羽毛筆), 초필(草筆), 작두필(雀頭筆) 등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모필은 황모 계통이 우수하고 중국필로는 옥란필(玉蘭筆), 난죽(蘭竹) 등의 장봉이, 일본의 경우는 채색필과 면상필 같은 세필(細筆) 계통이 발달되었다.
③ 벼루 : 단계연(端溪硯), 흡주연(洽州硯), 미자연(眉子硯), 와연(瓦硯) 등 산지와 재료 · 형태에 따라 무수히 많다. 단계연만 하더라도 석질에 따라 마간색(馬肝色)과 적황, 자색 계통으로 나누어진다. 각기 다른 문채(文彩)를 내는 것으로 되어 있고, 구욕안(鴝鵒眼), 청화(靑花), 초엽백(蕉葉白), 주사반(朱砂斑), 충취점(蟲翠點) 등으로 세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충남 보령산과 전북 김제산이 유명하다.
④ 먹 : 재료에 따라 갈색조의 유연묵과 청색조의 송연묵으로 대별된다. 우리나라는 소나무가 많아서 전통적으로 송연묵의 산지로 유명하여 중국에까지 조선 송연묵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중국 중심의 명묵은 대개가 청나라의 건륭어제(乾隆御製)인데, 곤륜현실(崑崙玄實), 월정(月精), 용덕(龍德), 산수청음(山水靑音), 천세금(千歲芹), 황산송(黃山松) 등이 보묵(寶墨)으로 전해진다. 일본의 먹으로는 나라야케(奈良八景)를 명품으로 친다.
현대 문명의 급격한 도래로 전통적 동양화 재료의 생산은 많이 위축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차차 전통 재료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옛 산지와 화구 제작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종이의 경우, 20세기에 새롭게 조명 받은 대표적 전통 재료로서 전북특별자치도 일원의 한지 공장에서 가내공업의 형태로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강원 일원에서 닥지가 생산되고 있고, 전주 지방은 비교적 정교한 전문가용 화지의 생산으로 이름이 높다. 중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장쑤(江蘇) · 저장(浙江) 지방에서 정교하고 부드러운 남지가 생산되고 있다.
붓의 경우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황모의 특산지로 알려져 있을 만큼 양질의 황모가 많이 생산되었다. 전주 · 안동 등에서 수공업적 형태로 생산되어 서울의 인사동에 집결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쉬안저우(宣州)와 쑤저우(蘇州)가 양호의 특산지로 알려져 있다.
벼루는 우리나라의 경우 황해도 해주산을 상품으로 치고, 충청남도 보령과 경북 포항산도 양질로 친다. 중국의 경우 쑹화강(松花江) 연안과 간쑤성(甘肅省) 일대에서 마묵도가 좋은 황석연(黃石硯)이 생산된다. 대체로 후난성(湖南省) 장링(江陵)과 후이저우산(徽州産)을 상품으로 친다.
화구의 대량 생산체제와 필기구의 혁신적 변모로 인하여 현대에 와서 전통적 화구의 생산과 수요는 전에 비해 위축된 상태이다. 그러나 옛날과 같은 영화는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영세하나마 화구 생산의 맥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광주의 충장로 등에 협소하게나마 먹 시장과 같은 전문 화구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영세한 가내공업에 의하여 제작된 화구가 총집결하는 곳은 서울의 인사동이다. 그 밖에 울산과 대전에 몇몇 제묵 회사가 있고, 강원 강릉과 특히 전북 전주에 제지공장이 모여 있다. 중국산으로는 쑤저우산 모필과 산둥성(山東省) 칭저우산(靑州産) 벼루 등이 간간이 흘러들고 있다. 그러나 그 진위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림도 시대의 요청에 따라 그 내용이 바뀌어 가고 있으니 새로운 정신의 표현은 또 새로운 양식을 낳고 그 양식은 계속 새로운 재료와 도구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화구가 지녀 왔던 질료 이상의 정신성을 이해하고 보다 더 다양한 화구를 개발하여 창작의 폭을 넓혀 나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