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이영(李瓔). 자는 양지(良之). 세종의 아홉째 왕자로(왕위계승 서열로 아홉째이나 출생순서로는 여섯째 왕자), 어머니는 영빈 강씨(令嬪姜氏)이다. 박중손(朴仲孫)의 사위다. 1433년(세종 15) 화의군에 봉해지고, 1436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441년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민가 여인에게 남복(男服)을 입혀 궁내로 들이려다가 수문장에게 발각되어 직첩과 과전을 몰수당하였다. 1447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나, 1449년 조관(朝官)의 기첩을 빼앗은 사건으로 다시 직첩이 몰수되었다. 이듬 해에 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다.
1455년(단종 3) 평원대군(平原大君)의 첩 초요경(楚腰輕)과 사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또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부처(付處)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같은 해 세조가 즉위하면서 대간(臺諫)으로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혜빈양씨(惠嬪楊氏)와 결탁해 국가의 기틀을 어지럽혔다는 탄핵을 받고 외방에 부처되었다.
1456년 사면되었지만, 그 해 상왕(上王: 단종) 복위사건에 가담해 가산을 적몰당하고 고신을 회수당한 뒤 전라도 금산에 안치되었다. 1457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했다가 사사(賜死)되고, 영월에 방출된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교살(絞殺)되자 이에 연루되었다.
1482년(성종 13) 성종의 호의와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 윤사흔(尹士昕) 등의 찬성으로 외방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1484년에는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유교(遺敎)에 따라 중앙과 지방 등 편리한 곳을 택해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선원록(璿源錄)』에 이름만 오르고 관작이 삭제되었던 것을 1518년(중종 13) 손자 이윤(李綸)의 요청으로 관작이 추복되고 자손도 종친록에 추록되었다. 품행은 문란했지만 절의가 있었고,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일찍이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세종대의 한글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훈민정음처의 감독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구축하면서 단종조의 충절이 인정되어 정단(正壇)에 배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