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를 발판으로 1904년 5월 21일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의으로 옮겼다.
이에 일본은 우선 연해어업권, 내하(內河)·연해항해권, 철도부설·관리권, 통신기관 관리권 등의 이권을 강점하고, 또한 내정개혁이라는 구실 아래 재정권·외교권·내정권 등에까지 침략야욕을 드러냈다.
황무지개척권 요구 역시 이와 같은 일제의 대한경영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다. 요구의 직접적인 동기가 일본인의 식민을 목적으로 다수의 일본인 농민을 한국에 이주시키고, 아울러 한국의 농지를 개방시켜 원료 및 식량공급기지로 삼으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대한침략 의도가 농후하였다.
일본은 같은 해 6월 6일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를 통하여 정식으로 한국 외부(外部)에 황무지개척권을 넘기라고 요구해왔다. 이때 일제는 나가모리(長森藤吉郎)라는 일본인을 앞세우고 한국이 그에게 50년 동안 전국 황무지의 개척권을 위임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10조로 된 위임계약안을 보면, 한국 황무지의 개간·정리·척식(拓植) 등 모든 경영권과 그곳에서 얻어지는 모든 권리를 광범위하게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제의 무모한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국민의 여론은 비등하였다. 러일전쟁 이래 점차 주권이 강탈되어 울분에 차 있던 국민들은 전국토의 3할에 해당하는 황무지를 한푼의 대가도 없이 강탈하여 가려는 일제의 만행을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
6월 중순부터 전국적으로 궐기의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였고 상소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유학(幼學) 김기우(金箕祐), 진사 정동명(鄭東明), 임은교(任殷敎) 등 21명이 먼저 배일통문(排日通文)을 작성, 전국에 배포하여 이에 항의하였다.
그 뒤 통문은 곧 『황성신문(皇城新聞)』 및 『한성신보(漢城新報)』 등에 보도되어 거족적 반대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보도 후 상소운동이 연일 계속되었는데, 6월 20일에는 전 의관(議官) 정기조(鄭耆朝), 전 감찰(監察) 최동식(崔東植) 등 10여 명이 사방에 통문을 보내어 동지를 규합, 소청(疏廳)을 차리고 정일영(鄭日永)을 소수(疏首)로 복합상소하였다.
이어 22일에는 이상설(李相卨)이 상소하였고, 25일에는 전 의관 홍긍섭(洪肯燮)이 중추원에 상서(上書)하여 황무지를 한국민의 자력으로 개간하도록 건의하였다. 또, 27일에는 일단의 유생들이 소청을 차리고 이건하(李乾夏)를 소수로 항의상소를 올렸다.
또한 29일에는 유학 허식(許式)·이만설(李萬卨) 등이 반대상소를 하고, 전 비서승 윤병(尹秉), 전 군수 홍필주(洪弼周), 전 승지 이범창(李範昌), 전 주사 이기(李沂) 등도 소청을 차리고 항의상소를 올리는 한편, 대국민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유생 및 전직·현직 대신들의 반대상소와 선언문에 상응하여,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의 언론에서도 논설과 기사로 일제히 일본의 이러한 요구를 규탄하였다.
한국민의 이러한 반대운동은 대체로 네 가지 주장에 입각해 있었다. 첫째 일제는 개간을 빙자하여 황무지 소유는 물론 전국토를 영유하려는 술책을 꾸미고 있으며, 둘째 일본은 개간을 구실로 한국전역에 일본인을 식민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으며, 셋째 개간에 동원되는 일본인으로 말미암아 지방치안이 문란해지게 되고, 넷째 산림·천택·진황(陳荒) 등의 황무지를 일제에게 모두 양여하게 되면 한국민은 실제생활에서 일대타격을 입게 된다는 등의 이유가 그것이다.
한편, 전국민의 이러한 반대운동에 힘입은 중추원 부의장 이도재(李道宰), 김종한(金宗漢)·안필중(安必中) 등의 유력자가 주동이 되어 문제의 황무지를 한국민의 자력으로 개간할 목적으로 농광회사(農鑛會社)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반대운동을 조직적이고도 더욱 강력하게 전개하고자 전 의관 송수만(宋秀萬), 심상진(沈相震) 등은 보안회(保安會)를 조직하고, 구국민중운동(救國民衆運動)으로 더욱 확대, 발전시켜나갔다.
보안회는 종로에다 소청(疏廳)을 두고 공개성토대회를 열어 일본의 요구에 결사반대를 외치면서 전국에 통문을 발하였다. 한편, 정부요로에도 공함을 보내어 일제에 단호하게 대처해나갈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일본공사관, 나아가 각국 공사에게도 서한을 보내어 국제여론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보안회의 활동이 날이 갈수록 격렬해지자, 당황한 일본은 보안회의 해산과 집회금지를 강력히 요구해왔다. 그러나 비등하는 국론을 등에 업은 보안회에 대하여 정부로서는 미온적인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은 7월 16일부터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해산을 강요하는 한편, 송인섭(宋寅燮)·송수만·원세성(元世性) 등의 보안회 주요간부들을 일본공사관이나 일본군영으로 납치·억류하는 등 강경책으로 맞섰다. 이때 언론에서는 연일 일본의 불법행위를 폭로, 규탄하였고, 정부에서는 피랍자의 반환교섭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편, 보안회의 활동과 함께 유생·대신들의 상소운동도 더욱 강경, 격렬해졌다. 봉상사부제조(奉常司副提調) 이순범(李淳範) 등은 상소하여 일본공사의 불법행위를 통렬히 논박한 뒤, 그를 추방시켜 본국에서 징죄하도록 하라는 주장까지 펴기도 하였다.
일제는 7월 21일 한국의 치안을 그들의 군경으로써 담당하게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보안회의소(保安會議所)와 전동(典洞)의 한어학교(漢語學校, 소청이 이곳으로 옮겨 왔음)에 대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한국정부는 일본경찰의 즉시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보안회에 대해서도 해산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23일에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거절하는 긴급고시를 전국에 반포하였다.
일본공사 하야시도 이 사실을 본국정부에 보고하고 일시철회를 건의하여, 한국정부가 원칙적으로 승낙한다는 조건하에 철회토록 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이에 하야시공사는 8월 10일까지 한국정부와 교섭한 끝에 한국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일단 정식으로 철회하게 되었다.
보안회의 이와 같은 반대운동은 1898년독립협회가 벌인 만민공동회 이후 최대의 민중구국운동이 되었다. 일본은 이때 실패한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관철할 기회를 노리다가, 1907년과 1908년에 이르러 점진적인 방법으로 동양척식회사의 사업의 일환으로 끝내 목적을 달성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