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경상남도 밀양 출신. 일명 관운장(關雲長). 호는 백민(白民). 황문옥(黃文玉)의 외아들이다.
1908년 상동고명학원(上東高明學院), 마산창신학교(馬山昌信學校), 밀양동화학원(密陽同和學院) 등을 설립하고 젊은 학도들에게 『동국사감(東國史鑑)』이라는 국사책을 저술, 가르쳐 독립과 애국정신을 함양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참여, 대구 악질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사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일본경찰에게 주목받게 되자 1918년 만주의 길림(吉林)으로 망명하였다. 그 곳에서 서일(徐一)·유동열(柳東說)·김규식(金奎植)·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재정 담당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였다.
1918년에는 기미독립선언서보다 1년 앞서 만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기에서도 재정위원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금에 힘써 당시 18만원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모았다.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관리인인 양인보(梁仁甫)를 설득시켜 경상남도 창녕군의 척식회사 소작료 1년분을 그대로 임시정부 자금으로 헌금하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에서 김원봉(金元鳳)·곽재기(郭在驥)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 밀양폭탄사건에 가담해 검거되었다. 징역 7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의 혀를 깨물어 끝내 자백하지 않아 일본경찰은 백지로 기소해야 하였다.
출옥한 뒤 신간회(新幹會) 조직에 참여, 서기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