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득(敬得). 이조판서 황흠(黃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서하(黃瑞河)이고, 아버지는 호조참판 황재(黃梓)이며, 어머니는 권욱(權煜)의 딸이다. 창성위(昌城尉: 영조의 10女壻) 황인점(黃仁點)의 형이다.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유학(幼學)으로 반제(泮製)에 수석하여 1747년(영조 2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춘추관의 한림에 적합한 자로 뽑히고 설서가 된 뒤 겸설서·정언을 거쳐, 1753년에는 문학에 이어 지평·겸문학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도당록회권(都堂錄會圈: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해 의정부에서 권점을 찍음)에 수석하고 헌납이 되었으며, 이어서 부수찬·실록청찬집낭청(實錄廳纂輯郎廳)을 거쳐 1756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1758년에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부제학·이조참의를 거쳐 1760년 대사헌이 된 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1762년 우유선(右諭善)·대사간·이조참판·유선·좌부빈객에 이어 빈객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한성부좌윤·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예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왕세자 책봉칙지(冊封勅旨)를 가져오는 사행을 맞기 위하여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이어서 한성부판윤·이조판서를 역임하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765년 병조판서·홍문관제학에 이어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병사하였다.
청렴결백한 관료생활로 가정이 몹시 빈한하였으므로 영조는 매우 애석하게 여기고 부의를 후히 내리도록 명하는 한편, 치제문(致祭文)과 함께 정효(貞孝)의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