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이라 함은 소나무가 오래되어 줄기의 속이 성숙해지며 붉은색을 띠게 되어 재질(材質)이 크게 향상된 것을 말한다. 수간(樹幹)의 횡단면은 바깥쪽으로부터 수피(樹皮), 변재(邊材:白邊이라고도 한다), 끝으로 안쪽이 심재(心材:黃腸이라고도 한다)이다. 심재는 세포 안에 물질이 충전되어 변색하게 되고 부후균(腐朽菌)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며, 목재 이용상 각종 물리적 성질이 개선되고 시각적으로도 대단히 아름답게 보인다.
이러한 황장재는 소나무가 오랜 세월 동안 자라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황장재는 곽재(槨材)로 숭상되었는데, 임금의 관은 황장재로 만든다는 기록이 있다. 즉, 1420년(세종 2) 예조의 계(啓)에 “천자(天子)의 곽은 황장으로 만들고 군제후(君諸侯)도 송장(松腸)으로 관을 만드는데 황장송심(黃腸松心)이 그것입니다. 옛적부터 천자제후의 곽을 반드시 황장으로 만드는 이유는 황심은 목재가 견고하고 오래되어도 썩지 않으며 백변은 내습성이 없어서 속히 썩는 데 있습니다.” 하는 내용이 있다.
또, 1424년 예조의 계에 “우리 나라의 소나무는 근래 작벌이 심해서 깊은 산중에 가도 광판(廣板)을 얻을 만한 것이 희소하여 관재를 얻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어서 관을 만들고자 해도 세상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천자제후의 장례에 있어서도 나무를 이어 관을 만들도록 하여 옛적의 폐습을 고치는 것이 타당합니다.”라는 의견을 재가한 바 있다.
황장봉산의 목재는 국가용재였으므로 왕은 흔히 신하의 장례에 작관용(作棺用)으로 황장재를 내려준 사례가 많다.
≪속대전≫에 의하면 1746년(영조 22)에는 황장봉산이 경상도에 7개 소, 전라도에 3개 소, 강원도에 22개 소로 되어 있고 그 뒤에 이것은 더 증가하고 있다.
치악산 구룡사(龜龍寺) 입구 쪽에 행질이 뛰어난 적송림이 있고, 그 숲 안에 ‘黃腸禁標(황장금표)’라고 새긴 큰 암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것은 황장봉산을 나타내는 표석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임정의 발자취를 엿보게 한다.
황장목은 봉산에서만이 아니라 다처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1541년(중종 36) 공조판서의 계 가운데 “전에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자가 정선(旌善) 땅 금산에서 많은 황장목을 끊었기로 형조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도록 하고 끊은 목재는 몰수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금산도 황장목을 공급하던 곳임을 알 수 있는데, 금산과 봉산의 뜻의 차이는 원칙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