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 ()

정치·법제
인물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무역성 부상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대용(大用)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1963년
출생지
경상북도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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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황태성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무역성 부상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6년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920년대 김천과 상주 등지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 활동 중 체포되어 2년을, 출소 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으로 체포되어 3년 6개월을 복역하였다. 1946년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9월 총파업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월북하였다.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김일성의 밀사로 남파되어 혁명위원회의 박정희 의장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정의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무역성 부상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1906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대용(大用). 1929년조선공산청년회에 가담하여 경상도 책임자로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으로 다시 체포되었다. 월북 후 1961년김일성의 밀사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6년 경상북도 상주의 중농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냈다. 그리고 1921년경성공립제1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4년 동맹휴교 사건에 연루되어 퇴학당하였다. 1925년 4월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10월에 또 다시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 뒤 김천에서 부산 출신 홍보용(洪甫用)과 함께 금릉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25년 9월 김천청년연맹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 무렵 김천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단체 독서구락부를 결성하였고, 동시에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활동하던 김천노우회의 성격을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바꾸는 데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26년경 민족협동전선론이 대두되자 김천지역의 대중운동 단체들의 상설회의체인 김천협의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6월에 신간회(新幹會) 김천지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김천지국 기자로 언론에 종사하면서 1928년 1월에 치루어진 경북기자대회의 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이 대회를 통해 결의된 경북청년연맹(조선청년총동맹 경북연맹)의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경북지역의 사회주의 세력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경북위원회(경북도당) 결성에 참여하고, 조선공산당 경북책임위원 및 고려공산청년회 경북책임자와 고려공산청년회 김천야체이카로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상주청년회에 가입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경기도 경찰부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한 달간 수감되었다.

1929년 4월 서울에서 조선공산청년회를 결성하고 정치부 담당 집행위원 겸 경상도책임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1931년 4월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출판법·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출옥한 후에 김천으로 돌아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혁명적 대중운동을 전개하여 서울의 비밀결사와 결합해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하부조직인 김천그룹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3년 6개월의 실형을 언도 받고 복역하였다. 1944년에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에 가담하고 전라도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 경기도당 위원이 되었다가 10월 대구에서 경북인민위원회의 선전부장과 조선공산당 대구시당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구지역 정당 및 사회단체 76개가 연합하여 결성한 조선신탁관리반대 공통투쟁위원회에 경북인민위원회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기획부 위원이 되었다. 1946년 2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중앙 및 지방 동지 연석간담회’에 경상북도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의장을 맡았다. 6월 대구에서 한민당·한독당·인민당·공산당 등 좌우정치 세력의 4개 정당 지부가 연합한 대구공동위원회에 공산당 5인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1946년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9월총파업이 대구에서는 기아투쟁과 결합되면서 ‘10월사건’으로 확대되자 10월 1일 밤 지역 내 야체이카를 소집하여 시위방침을 하달하고, 다음날 모여든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등 항쟁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항쟁이 좌절되자 검거를 피해 북한지역으로 피신하였다.

1948년 8월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무역성 부상을 역임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발생 후 남북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밀사로 남파되어 혁명위원회의 박정희(朴正熙) 의장을 만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의장은 만나지 못하고 10월 간첩혐의로 구속되어 사형당했다.

참고문헌

『한국 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강만길, 창작과비평사, 1996)
『한국 근현대 인물』(북악사학회, 백산출판사, 1994)
『박정희, 파멸의 정치공작』(이상우, 동아일보사, 1993)
「남파 간첩 그 '전설'과 '의혹': 정전 50주년 맞아 되짚어 본 '스파이 스토리'」(안철흥, 『시사저널』718호, 2003)
집필자
김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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