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발과 부록이 없어 저자의 생애 및 편찬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저자가 죽은 뒤 그가 강학하던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절산리에서 1962년경 후손과 문인 위계도(魏啓道) 등이 편집·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16권 9책.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계명대학교 도서관·전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2에 시 357수, 권3∼5에 서(書) 180편, 권6에 잡저 27편, 권7·8에 서(序) 118편, 권9·10에 기(記) 98편, 권11에 발(跋) 22편, 명(銘) 11편, 애사 3편, 상량문 3편, 축문 4편, 제문 17편, 권12에 비명 19편, 권13에 묘갈명 39편, 권14∼16에 묘표 46편, 서사(書事) 7편, 행장 1편, 전(傳) 7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제영(題詠) 및 각처를 유람하며 수려한 경관과 마주하여 지은 작품이 특히 많다. 문사적 기질이 짙은 낭만적 작품도 다수 있다. 「독두시(讀杜詩)」는 깊은 밤 불행했던 두보(杜甫)의 생애를 떠올리며 그의 시를 읽다가 느낀 감회를 적은 것이다.
「을유칠월칠일문일본항우연합국(乙酉七月七日聞日本降于聯合國)」은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뻐 환호하며 지은 장편이다. 일제강점기의 수모를 잊지 말고, 되찾은 나라의 기반을 반석처럼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 일치단결할 것을 호소한 내용이다. 「포상망춘(浦上望春)」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쪽빛 바다 아득한 물결을 바라보는 호탕 황홀한 심회를 노래하였다. 「제호산벽상(題湖山壁上)」에서는 약초 캐고 글 읽으며, 손자의 벗이 되기도 하고, 학과 사슴을 짝하여 대화를 나누는 은일적 삶의 자세를 천명하기도 하였다.
서(書)는 벗들과 주고받은 안부 편지 외에 학문적 내용을 문답한 것이 많다. 그밖에 시사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 「상율계정선생(上栗溪鄭先生)」에서는 스승 정기(鄭琦)의 편지를 받고 그 가르침에 감사하며 학문을 향한 자신의 다짐을 천명하였다. 곽기영(郭基永)과는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도학의 문제를 토론하였다.
「답곽우헌별지(答郭愚軒別紙)」에서는 주희(朱熹)가 오봉(五峯)의 심과 성의 상대설을 비평하면서 제시한 심성대립부당론(心性對立不當論)을 인용하여 심(心)과 성(性)의 관계를 해설하였다. 즉, 심통성(心統性)이라는 말처럼 마음속에 성이 있다는 뜻이다. 「답황석전(答黃石田)」·「답김이회(答金而晦)」·「답정경시(答鄭景施)」 등은 주로 조긍섭(曺兢燮)의 고문론에 대한 황원(黃瑗)의 비판적 태도를 논란한 내용으로, 당시 고문론의 한 양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된다.
잡저의 「대학척의(大學摭義)」는 『대학』의 서문에서 장구(章句) 또는 잔주에 이르기까지 긴요하고 의문이 제기될 만한 부분에 대해 문답 형식으로 해설한 것이다. 「강설(强說)」에서는 예로부터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으로써 도를 지킨 현인들의 위대한 업적을 예찬하였다. 「이지설(二至說)」은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한 것이 없고, 지극히 중요한 것은 자식 교육만한 것이 없다.’라는 말을 강조하며, 일생 동안 실행에 힘쓸 것을 권면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