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박창의 비석은 방형으로 2㎝ 정도의 음각선을 둘러 장식하였다. 측면에 ‘효자리(孝子里)’라고 큰 글씨로 음각하고, 그 밑에 박창의 효행을 기록하였으나 마멸이 심해 판독하기 어렵다.
박창에 대한 내용은 『양산군읍지』(『경상도읍지』, 1832년 경) 인물조에 수록되어 있다. “박창은 고려인으로서 부친상을 당하여 깊은 골짜기에 초막을 짓고 밤낮으로 애통해 하였다. 왜적 세 명이 칼을 들고 왔다가 사연을 물으니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이에 감동하여 놓아 주었는데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해 정문과 비석을 세웠다.(朴暢高麗人 遭其父喪 廬于深谷 日夜哀痛 倭賊三人 持刀來問 暢答以實 敵感而釋之 旌門立碑)”는 내용이다.
이공미의 비는 박창의 비와는 달리 비 모서리 부분을 5㎝ 정도 깎아서 모를 죽인 형태이다. 측면에 ‘효자지리(孝子之里)’라고 2단으로 글씨를 새겼다. 박창의 비처럼 작은 글씨로 아래 부분에 음각하였으나 판독하기 어렵다.
이공미에 대한 내용도 『양산군읍지』 인물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공미는 고려인으로서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무덤을 지켰으므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정문을 세우고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李公美高麗人 守母墓三年 旌門復戶)”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