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에 갇힌 죄수는 밤낮으로 칼[枷]과 수갑[杻]을 채우고, 발에도 쇠사슬을 채우므로 신체의 부자유에서 오는 고통이 심하였다.
더욱이 옥 안이 좁고 불결해 이·벼룩·빈대를 비롯한 갖가지 흡혈해충 때문에 피부병이나 전염병에 걸리기 쉬웠다. 또한 약을 쓸 수도 없어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겨울에는 외풍이 심한 옥 안에서 솜옷과 솜이불 정도로 견뎌야 하기 때문에 동사자가 속출하고, 여름이나 큰 가뭄에는 더위에 지쳐 쓰러지는 자가 많았다.
식사도 주먹밥으로 끼니를 이어가기 때문에 굶주림을 참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족조차 없는 자는 사식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였다. 이렇듯 질병·추위 또는 더위·굶주림이 옥중삼고(獄中三苦)였다.
삼국시대 이래 이러한 죄수의 가련하고 딱한 처지를 돌보기는 했으나 고려시대까지는 큰 실효가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 세종 때 이르러 매우 적극적인 휼수정책을 펴서 비로소 본궤도에 올랐다. 법전에도 따로 휼수의 독립 조항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그 뒤 비교적 적극적으로 휼수정책이 펼쳐졌다.
≪경국대전≫ 예전 휼수조에 규정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앙에서는 사헌부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옥수의 사망 원인과 구료(救療) 상황을 감찰하게 하였다. 구료를 잘못해 옥수를 사망하게 한 관리는 중죄로 다스렸다.
둘째, 몹시 추운 11월 1일부터 1월 말일까지와 매우 더운 5월 1일부터 7월 말일까지 가벼운 죄를 범한 자는 수속(收贖 : 죄인이 죄를 면하고자 바치는 돈을 거둬들임)할 수 있게 하였다.
셋째, 경죄인으로서 병이 중한 자는 보방(保放: 신변보증인을 정해 가석방하는 것)하게 하였다. 또한, 사형수를 제외하고 부모상을 당하면 성복(成服)할 때까지 보방하게 하고, 정배죄인(定配罪人)이 부모상이나 조부모상을 당하면 3개월 동안 가석방하였다.
넷째, 유배죄인은 가족을 데려갈 수 있게 하였다. 이 밖에도 수시로 수교(受敎)에 따라 돌볼 사람이 없는 죄수에 한해 급식하게 하거나 질병 치료를 위한 의료 시설을 갖추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