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멸망 후 당에 들어가 무장(武將)으로 명성을 떨친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아들 흑치준(黑齒俊)의 생애와 활동을 기록해 무덤 속에 부장했던 묘지명이다. 크기는 세로 53㎝, 가로 52㎝로 정방형에 가깝다.
명문은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한자씩 새겼다. 제목이 「대당고우금오위수익부중랑장상주국흑치부군묘지명병서(大唐故右金吾衛守翊府中郞將上柱國黑齒府君墓誌銘幷序)」이다. 총 26행으로 1행당 보통 26자씩 새겨져 있고, 도합 642자이다.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는 미상이며, 글씨는 단정한 해서체이다. 제작시기는 신룡(神龍) 2년(706) 8월 13일에 북망산에 묻힌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대략 그 무렵으로 추정한다.
이 묘지명의 출토경위는 최초의 소장자인 이근원(李根源)의 「곡석당지목(曲石唐志目)」이라는 해제에 어느 정도 밝혀져 있다. 1929년 10월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망산(邙山)에서 아버지인 흑치상지의 묘지와 함께 출토되었다. 그리고 1931년에 뤄양의 북망산 일대를 유력(遊歷)하던 이근원이 구입·소장하였다.
이후 이근원은 이를 같이 구입한 당대의 지석 92종과 함께 강남 소주(蘇州)로 옮겨 곡석정려장구십삼당지실(曲石精廬藏九十三唐志室)을 지어 보관하였다. 이 때 당시의 저명한 학자였던 장태염(章太炎)이 묘지명의 탁본을 보고 제발(題跋)을 쓰기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이근원은 이를 소왕산(小王山)의 산록에 있는 관제묘(關帝廟) 앞의 작은 연못에 숨겼다. 그 뒤 1945년에 소주시문물보관위원회(蘇州市文物保管委員會)에 기증하자, 소주시문물보관위원회는 남경박물원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현재도 그 곳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묘지명은 내용상 대략 네 개 단락으로 구분한다. 첫째 단락은 제(題)로서 흑치준이 당왕조로부터 관직과 훈작이 기록되어 있다. 둘째 단락은 서(序)의 첫머리로 그의 휘와 생평에 대한 총괄적 평가 및 선대에 대한 내용이다. 아버지인 흑치상지 묘지명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셋째 단락은 그의 품성과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칭송하는 부분과 당왕조에서의 역관 및 공훈, 그리고 사망 및 장례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따르면 흑치준의 최종 관직은 우금오위익부중랑장상주국(右金吾衛翊府中郞將上柱國)이었다.
신룡(神龍) 2년(706) 5월에 3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고, 그 해 8월에 북망산 언덕에 장사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무덤은 묘지의 출토경위에서 유추하면 아버지인 흑치상지의 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단락은 그의 생애와 공적, 그리고 요절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기일(其一)에서 기오(其五)의 다섯으로 나눈 운문 형식의 명(銘)이다.
이 묘지명은 아버지인 흑치상지묘지명과 더불어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서 보이지 않는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 백제사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첫째는 흑치상지의 장자(長子)인 흑치준의 존재가 밝혀짐으로써 그의 여동생에 관한 기록인 산서성 천룡산 천룡사(天龍寺)의 순장군공덕기(珣將軍功德記)와 더불어 흑치상지 가계의 행방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둘째는 선대(先代)에 대한 기록 가운데 흑치상지묘지명에도 보이지 않는, 그들이 백제에서 역임한 관직을 당의 관직인 자사(刺使)와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비정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로써 흑치씨 가문의 백제에서의 관직 역임상황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셋째는 당에 끌려 온 백제계 유민의 활동상을 시사하는 자료로서 일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