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크기 가로 57㎝, 세로 42㎝.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글은 권적(權適)이 지었으며, 글씨는 자경 1.5㎝의 해서로 당시 유행하던 구양순풍(歐陽詢風)보다 사경서풍(寫經書風)에 가깝다. 자간(字間)에 구애받지 않아 분방한 맛이 난다.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개풍군 흥왕사지에서 출토되었다. 징엄은 숙종의 아들로 8세에 흥왕사 제1대 주지였던 의천(義天)에 귀의하고 이듬해 중이 되어 불일사(佛日寺)에서 수계(受戒)하였다. 학문에 전념하여 화엄의 큰 뜻을 통하였다.
홍원사(洪圓寺)·개태사(開泰寺)·귀신사(歸信寺)·흥왕사 등에 머물렀다. 1122년(인종 즉위년)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은퇴하였고, 1131년 왕명으로 흥왕사에 머무르다가 1141년 입적하였다. 왕은 국사로 추증하고 원명이라는 호를 내렸다.
장례는 흥왕사 제2대 주지로서 의천의 고사(故事)대로 치렀으며, 흥왕사 서쪽 천덕산(天德山) 남록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거두어 승천부 약산촌 북원(承天府 藥山村 北原)에 안장하였다 한다. 묘지도 이때 유골과 함께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