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 출신으로, 1928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당에서 2년간 한학(漢學)을 배웠다.
김재욱은 1914년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후 사방공사 노동자, 광산 노동자, 영주군 임시면작(綿作) 지도원으로 일했다. 1935년 5월 영주적색노동조합건설위원회 조직에 참가하였고, 선전부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그는 1945년 12월초, 소련 국적을 가지고 소련에 거주하다가 8·15해방을 계기로 허가이(許哥而), 박이완 등과 함께 입북하였다. 1946년에 소련군으로부터 북조선 노동당으로 적을 옮겼고, 그 해 8월 북한노동당 제1차 당대회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8년 3월, 북한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상무위원, 1949년 2월 평남도당위원장, 1955년 12월 농업부 부장을 맡았다.
그는 1936년 2월 ‘조선공산당 김천그룹재건협의회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45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당과 정권기관, 군 등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소련에서의 경험을 북한에 전수하고 소련과 북한을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했다. 김재욱을 포함한 소련파는 1956년 8월 연안파와 합세하여 핵심지도부의 전후 복구건설노선과 개인숭배를 비판하면서 김일성에게 도전하였다.
김재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숙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