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수교협상은 북한과 일본 정부 간에 국교 정상화를 위해 열린 일련의 외교협상이다. 1990년 예비회담부터 13차 본회담이 개최되었던 2006년까지 열렸다. 때로는 전진하고 때로는 결렬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협상의 과정에는 일본 정당·의원 외교, 북미관계의 추종(혹은 동조), 남북관계와의 경쟁 등이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일본인 납치 문제로 수교 협상이 난항을 거듭해 북일관계 전반을 극도로 냉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2006년을 끝으로 2018년 현재 북일수교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북한과 일본 간의 수교를 위한 이 협상은 예비회담이 시작된 1990년부터 13차 본회담이 개최되었던 2006년까지 개최된 바 있다. 초기에는 빈번하게 협상이 이루어졌으나, 2006년을 끝으로 2018년 현재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는 일본인 납치문제로 인해 수교협상이 난항을 거듭하였으며, 결국 북일관계 전반을 극도로 냉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북한과 일본 간의 민간교류는 1954년부터 시작되었으나, 교류문제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정권이 등장한 이후인 1955년 이후부터였다.
정부 간 협상을 거부했던 일본정부도 북일 관계의 개선이 민간교류 차원이라는 것과 일본외교의 정경분리원칙을 내세워 사실상 양국 간 접근을 허용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대북접근을 용인한 배경에는 일본 내 좌익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면서 북한과의 채널을 유지, 북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자 했던 동기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부터 2006년까지의 북일수교협상사를 협상의 연속성과 단절성을 고려하여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1990년부터 1991년까지 개최되었던 제1∼8차 수교회담의 시기이고, 제2기는 2000년에 개최되었던 제9∼11차 수교회담의 시기이다. 제3기는 2002년 제1차 북일 정상회담에서 제12차 수교회담에 이르는 시기이고, 마지막 제4기는 2004년 제2차 북일 정상회담에서 2006년 2월 제13차 수교회담에 이르는 시기이다.
북한과 일본의 정부 간 접근은 1989년부터 시작되어 1992년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북일 간의 급속한 접촉은 크게 두 가지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Sergeeivich Gorbachev)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 선출과 뒤이어 발생한 독일의 통일이었고, 두 번째는 북한의 국제적 개방화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제18 후지산 마루 호 선원의 석방과 대북관계개선을 위하여 이러한 상황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해 나갔다. 일본은 서울 올림픽 대회 직전,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에 의한 대북제재조치를 해체시켰으며, 1989년 1월에는 일본 사회당의 정기총회에 참석하는 김양건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노동당 대표단을 전제조건 없이 일본에 최초로 입국시켰다.
1989년 3월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일본 수상은 국회발언을 통해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에 대해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의 뜻이 담긴 ‘신견해’를 밝힘으로서 북한과의 협상 개시를 위한 돌파구를 만들고자 했다.
이후 양국관계는 일본 사회당이 북한과 일본 정부의 중재역을 수행함으로서 ‘3당 공동선언’으로 발전했고, 3차례에 걸친 예비회담과 8차례에 걸친 정부 간 공식협상(1991년 1월 3일∼1992년 11월 5일)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특징을 요약하면, 첫째, 미소 간에는 냉전이 종식되었고, 둘째, 한국은 소련, 중국과의 수교협상을 신속하게 모색하고 있었고, 셋째, 남북한 관계는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과 남북총리회담의 개최로 화해의 분위기였고, 넷째, 한일관계는 북방진출을 둘러싼 미묘한 경쟁관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다섯째, 북한은 국제적 고립으로부터의 탈피와 경제난의 해소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가네마루 신과 다나베 마코토의 평양방문의 결과, 전후 처음으로 양국 정부 간 협상을 위한 예비회담이 북경에서 개최되었다. 북한과 일본은 기본문제, 국제문제, 경제문제, 쌍방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 등 4개의 쟁점 분야에서 서로 원칙적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본 교섭의 조기 개시가 어려워질 것을 고려하여 양국 어느 쪽도 자국의 입장을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게끔 의제를 애매모호하게 설정하여 의제를 확정하고, 본 회담에 들어가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1991년 1월 30일, 제1차 북일수교 본 회담을 시작으로 양국은 2년여에 걸쳐 총 8회의 수교회담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1994년 이후 일본 외무성은 북미 간의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북한과의 수교회담을 추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미관계가 호전되고 1995년 KEDO(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발족함에 따라 28일 북한의 초청으로 일본 연립 3여당 대표단이 방북하였고, 이들은 조선로동당 대표단과 합의하여 「북일협상 재개를 위한 4당 합의서」를 발표하였다. 합의서 발표 이후 대북 식량지원을 강화하는 등 일본의 움직임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1996년 1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이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으로 바뀌고 빌 클린턴과 하시모토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미일방위협력지침(Guide Line)」 개정은 이후 북일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되었다. 이어서 1997년 2월 북한의 여중생 요코다 메구미 양 납치의혹이 제기되자, 일본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북일관계는 더욱 경색되었다.
1997년 후반부터 1998년 초반 초반까지 협상재개를 위한 북일 양국의 노력이 계속되었지만 결국 이러한 노력도 일본인 납치문제로 인해 무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울러 북송 일본인 처의 방일도 중단되었다.
게다가 1998년 8월 북한의 ‘광명성 1호(대포동)’ 즉 미사일 운반체계 시험발사 사건을 게기로 북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즉각 북한과의 수교 협상을 동결하고, 식량 등 인도적 지원이나 한반도 경수로(Light Water Reactor)건설 사업에 대한 협력을 보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999년 9월 12일 베를린 고위급 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이 대포동 미사일 발사유예과 경제제재 해체 및 식량지원을 합의함에 따라 북일관계도 다시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1999년 10월 18∼20일 북일 양국은 싱가포르에서 외교 당국자 간 비밀접촉을 가졌고, 12월 1∼3일 무라야마 전 수상을 단장으로 하는 초당파 의원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노동당 김용순 비서와 수교회담을 재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합의의 큰 특징은 일본이 대폭적으로 양보하였다는 점이었다. 그 동안 일본인 납치사건 전제조건 혹은 결렬의 이유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이 안보문제는 페리 프로세스를 통해 미국, 한국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대처하고, 인도적 문제는 수교회담에서 분리하여 적십자사를 통해 해결한다는 점에 합의하였고 마침내 2000년 4월 5∼7일에 제9차 북일수교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양국 간에 제11차 수교회담이 결렬되기는 하였지만 수교를 위한 움직임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2001년 1월에 북한은 모리 일본 총리에게 방북 의향을 타진했고, 동시에 싱가포르에서는 모리 총리의 측근인 나카가와 히데나오 전 관방장관과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 간에 극비 접촉이 진행되었다.
이 접촉에서 과거청산 문제와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한 양측의 입장이 팽팽히 대립하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먼저 양국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리 총리가 방북 협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잇단 정치적 구설수와 지지율 하락으로 중도 퇴진함에 따라 정상회담 문제는 후임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2001년 등장한 미국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온건정책을 전면 재평가하였으며,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의 대북 정책이 강경하게 전환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또한 동년 11월에는 일본 경찰이 1999년 5월 파산한 ‘조선도쿄신용조합’에 대한 대북송금 비리수사와 그와 관련한 조총련 중앙간부에 대한 강제수사를 단행하면서 북일관계는 또다시 냉각되었다.
그러나 2002년 들어 4월 30일 북경에서의 제3차 북일적십자회담, 7월 31일 브루나이 북일 외무장관 회담 등을 계기로 양국 관계는 다시금 진전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8월 18일∼19일에 평양에서 열린 제4차 북일적십자회담, 25∼26일에 열린 북일 외무성 국장급회담이 개최됨으로써 양국 관계는 더욱 호전되었으며, 고이즈미의 방북과 북일정상회담 문제도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제12차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 정부는 이듬해인 2003년 7월 31일 납치문제 전문 간사회에서 생존자 5명의 가족 귀국을 국교 정상화 교섭 재개 시점까지 실현하며, 이에 대한 대가를 제공하지 않을 것, 그리고 사망자 10명에 대한 정보제공도 요구할 것임을 정부 방침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일본 국내에서는 납치 관련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였고,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납치되었다가 살아서 돌아온 5명 밑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10명의 가족과 친지들을 중심으로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 가족 연락회(통칭 가족회)’가 결성되어 납치문제에 대한 직접적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 국회 내에서는 자민당 의원을 중심으로 하되 초당파적인 의원 모임인 ‘납치의원연맹’이 결성되었다. 또한 일반 시민들과 시민운동가들로 구성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 협의회’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정부도 내각 관방실에 납치문제를 전담하는 ‘참여’급 직책을 신설하고 납치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북한은 일본 측이 점차 수위를 높여 납치문제의 해결을 요구하자 납치문제가 북일정상회담에서 이미 해결된 것임을 계속 주장하면서 의도적인 무관심을 보여 왔으나, 일본 내에서 납치문제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기는커녕 각종 국제기구나 포럼, 정상회담 등을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제기되자, 어떤 형태로든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적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 정계에서 북한을 주 대상으로 하는 각종 압박조치들을 지속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점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편 납치문제는 북한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도 압박하고 있었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 관심의 증대는 일본 정부에 대한 납치문제의 조속한 해결이라는 과제를 전면에 등장시킴으로써 정부의 중요과제의 하나로 인식되게 되었고, 문제에 대한 해결을 도모해야 하는 정치적 압력은 점차 증대하고 있었다.
북일수교협상의 재개조건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정당외교 혹은 의원외교이다. 정부간 협상에 앞서서 협상개시 혹은 재개과정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정당외교이다. 협상 제1기를 보면 1989년 1월 일본 정부는 김양건 단장이 이끄는 조선로동당 대표단의 입국을 전제조건 없이 허락하는 등 북일협상을 위한 긍정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또한 1990년 9월에는 일본 자민당의 전 부총리인 가네마루와 다나베 사회당 위원장이 이끄는 자민당, 사회당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조선로동당과 「3당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협상 제2기에서도 정당외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99년 12월 1∼3일 방북한 무라야마 전 수상을 단장으로 하는 초당파 의원 대표단은 북한 노동당 김용순 비서와의 회담을 통해 수교회담 재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협상 제4기의 시작도 의원외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2003년 12월 히라사와 자민당 의원과 북한 정태화 대사와 송일호 외무성 부국장과의 회담, 2004년 4월 1∼2일자민당 전 부총재인 야마사키, 히라사와 의원과 정태화 대사와의 회담, 그리고 2004년 5월 4∼5일타나카 심의관, 야부나카 국장과 정태화 대사와의 접촉 등에서 납치문제 해결과 북일수교에 관한 전향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 정당 · 위원외교는 북일관계가 냉각되었던 시기에 가장 민감한 사안을 다룸으로써 더욱 부각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1990~2006년 사이의 북일 수교 협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때로는 전진하고 때로는 결렬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북일수교회담의 협상 결렬과 재개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서 ① 일본 정당 · 의원 외교, ② 북미관계의 추종(혹은 동조), ③ 남북관계와의 경쟁, ④ 일본 국내적 압력(납치문제) 등의 조건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