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난징조약〔南京條約, 1842〕으로 인하여 중국은 광저우[廣州], 상하이[上海] 등 5개 항구를 개항하였다. 1845년 상하이에 처음으로 영국조계가 합법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1844년중국 상하이 일대에는 서구열강의 무역상사로서 이화양행 등 11개의 양행(洋行)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화양행은 1880년대 초 제물포에 이화양행 교역소를 설치·운영하였다.
이화양행의 관심사는 인도의 아편과 필리핀의 향신료 등을 중국에 들여오고 중국의 차와 비단을 영국으로 수출하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에 진출한 직접적인 목적은 조선과 중국을 왕복하는 정기항로를 개통하고 광산채굴권을 획득하여 이득으로 올리고자 하였다.
이화양행의 설립자인 영국인 윌리엄 자딘은 1820년대 대중국무역 처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 후 1832년 자딘과 매티슨이 공동으로 ‘자딘매티슨 주식회사’를 중국 광뚱에 설립하였으며, 이 회사의 중국 명칭이 이화양행이다. 이화양행은 1880년대 초반 제물포에 교역소를 설치하였으며, 1880년대 중반까지 활동하였다.
1882년 조선으로 파견되기 전, 묄렌도르프는 이화양행 상하이 지점장과 상의하여 조선의 문호를 유럽에 개방할 것을 인지시켰으며, 상하이-제물포를 왕복하는 정리항로 개통과 광산채굴권 획득 등에 대하여 논의하기도 하였다. 1884년 이화양행은 상하이-나가사키-부산-제물포를 운행하는 화물증기선을 개통하였다. 1883년 7월 18일 이화양행은 경기도 용평 만세교의 사금장(砂金場) 채굴권을 양도받았다. 이화양행은 1884년 강원도 금화(金化)에도 진출하였다.
경기 양평의 만세교, 강원도의 금화·금성은 서로 인접한 지역이다. 이를 보면, 영국이 이 일대의 광산권을 광범위하게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근대적 상업조직과 경영방식, 선진기술과 대자본, 조선정부와의 긴밀성을 바탕으로 한 구미열강의 상업자본은 무역과 이권의 양 분야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침탈함으로써 조선 근대 자본주의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였고 종국에는 조선의 식민지화에도 일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