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11월 29일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에서 정석필(鄭錫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출생 후 곧바로 작은아버지인 장희안(鄭希顔)에게 양자로 들어갔으며,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정로식은 1922년 조선청년연합회 제3회 대회에서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2월 좌우합작통일전선체제인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집행위원 겸 재정부장,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2월 남조선노동당 중앙본부 중앙위원으로 있다가 1948년 월북하였다. 그는 1948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9년 남북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이 통합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1956년 노동당 중앙검사위원, 1957년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 1958년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정로식은 1919년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1921년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민립대학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에 관여했다. 저서인 『조선창극사』는 최초의 본격적인 판소리 저술로 꼽힌다.
1965년 7월 12일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