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문화협회는 소련 군정 하에서 북한과 소련 간의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설립된 문화단체이다. 소련 문화를 수용하여 조선민족문화를 건설하고 선진적 민주주의 문화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본제국주의 잔재 근절,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잔재 청산을 목적으로 전 생활영역에 걸친 소련의 성과를 학습하고 도입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45년 11월 11일 협회 창립 이후 비조직적이던 활동이 조직적·체계적으로 전환되었고, 문학, 예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었다. 1950년까지 활동이 활발했으나, 현재는 활동이 확인되지 않는다.
소련군과 북한 인민과의 우호와 이해를 강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민간단체이다. 북한은 붉은 군대의 조선해방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의 표시로 1945년 9월평양에 ‘붉은군대환영회’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붉은군대우호회’로 변경되었고, 이 우호회를 기반으로 1945년 11월 11일 북한과 소련 간의 문화 교류를 목적으로 평양에서 창립되었다.
소련 문화의 과학적 섭취로 조선민족문화를 건설하는 동시에 국제적 수준으로 향상시키고 전 생활영역에 걸쳐 소련이 달성한 성과를 배우고 도입하며 선전하는 데 있다.
1945년 말까지 소련군이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치교육의 내용은 소련군 작전부대의 과업, 북한 주민들에게 배포했던 호소문, 그리고 북한진주 후 소련군 정치부가 주도한 대중정치활동에 나타나고 있다. 해방 직후 소련군의 북한 주민들에 대한 대중 정치사업은 소련과 소련군의 역할을 알리고 계몽하는 군 정치교육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국가인 소련을 다방면에 걸쳐 소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초기에 소련군 위수사령부가 주둔 지역별로 산발적이며 비조직적으로 진행하던 대중정치선전활동은 1945년 11월 11일 조소문화협회의 창립을 계기로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북한의 조소문화협회의 활동은 소련의 보크스(BOKC:전소대외문화연락협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협회는 원래 다른 문화단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은 기관이었다. 1946년 6월 1일 6개의 지방조직을 가졌으며, 회원은 1,000명 미만이었다. 1946년 6월 18일 소련의 문호 막심 고리끼(본명: Aleksei Maksimovich Peshkov) 서거 1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문학가동맹과 공동주최로 기념제를 거행하였고, 6월 22일 소·독 개전 기념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되기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이기영(李琦榮)이 맡았으며, 한때 문학평론가 임화(林和)가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 협회는 중앙위원회 산하에 사회과학·문학·예술·체육·자연과학의 5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연구발표회·강연회·좌담회·보고회 등과 소련 학자의 지방강연회 등이다. 특히 문학 분과는 소련의 작품과 문학이론을 소개하거나 소련의 학술·문화·예술에 관한 책을 번역하여 보급하였으며 영화도 소개하였다. 그리고 1946년 7월 기관지 『조소문화』를 창간한 뒤, 1949년 10월 제호를 『조소친선』으로 바꾸어 1950년까지 발간하였다.
이 협회는 조선 문화와 소련문화의 교류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였기 때문에 선진적인 민주주의적 문화를 형성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근절하며, 생활·문화·관습 및 도덕 속에 스며든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했다. 또한 조선 문화 및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의 문화와 소련문화를 배우고, 조선인민과 민주주의 국가의 인민, 특히 소련인민과의 우호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조소문화협회는 공식적인 해체가 발표되지 않았지만, 그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협회는 민간단체이지만 당 외곽단체로서의 성격이 짙었고, 군정 실시와 함께 소련 문화가 북조선으로 대거 유입되는 과정에서 정식 통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소련 문화의 경험과 성과를 체계적으로 소화하여 인민대중에게 전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