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포크’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포크송은, 미국의 모던포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대중가요 양식이다. 따라서 포크송(folk song)의 원래 뜻이 민요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한국의 민요 전통 속에 놓인 것이 아니라 미국 민요에 바탕을 둔 미국 모던포크와 음악적으로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모던포크가 상업주의에 대한 반발과 비판적 사회의식 등이 강한 것에 비해, 한국의 포크송은 상업적 음반과 방송 활동을 거부하지 않았고 비판적 사회의식 또한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다소 두루뭉술하게 말하자면 어쿠스틱 기타의 소박한 반주의 노래는 모두 포크송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많으며, 실제로 팝의 연장선상에 있는 노래, 혹은 컨트리송, 요들송, 칸초네, 심지어 록 형태의 노래조차 어쿠스틱 기타로만 반주하면 포크로 불리는 경향이 있었다.
1964년에 서수남이 주도한 아리랑부라더즈가 컨트리뮤직으로 첫 음반을 냈지만 본격화되지 않았고, 1968년 청년문화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트윈폴리오나 뚜아에무아 등이 음악감상실에서 공연활동을 한 것에서 한국의 포크송은 본격화되었다. 이전의 대중가요인들과 달리, 1970년대 초에 포크송을 주도했던 이들의 상당수는 대학생들이었고 수용자 역시 대학생과 중고생들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포크송은 해방과 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 그 중에서도 대도시 고학력자들의 취향이나 문화의식과 관련 있다. 그런 점에서 포크송의 등장은 학생운동 등과 무관한 노래 취향의 세대교체로 보는 것이 합당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대중가요계의 상업주의와 상투성과의 거리두기, 기성세대의 취향에 대한 격렬한 반발의 태도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이전의 어느 양식보다도, 사랑노래를 넘어선 인생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담거나 상투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외국 노래의 번역·번안을 위주로 음악감상실이나 라디오에만 머물던 포크송은 1971년을 기점으로 창작 작품의 비중이 늘어나고 텔레비전에서의 인기몰이에 성공하는 등 확연한 성장의 모습을 보인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 은희의 「꽃반지 끼고」가 대중적 인기의 견인차가 되고, 자작곡가수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서유석 사월과오월 등이 신작을 발표하기 시작하며, 대표적인 비판적 포크 작가로 꼽히는 김민기와 그의 중요 가창자인 양희은이 「아침이슬」 등을 발표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이로부터 1975년까지 포크송은, 김세환, 어니언스, 이연실, 김정호 등 인기 가수들을 양산하고 미국에서 성장하여 한국 풍토와는 이질적인 비판적 자작곡가수 한대수의 독집음반도 발매되는 등 승승장구 성장하며 청년문화를 이끌었다.
이 시기에 한국 포크송의 중요한 양식적 특징이 형성되고 정립되었다. 화성을 연주하는 어쿠스틱 기타를 반주악기로 삼는다는 점, 가수 스스로 반주까지 연주하여 가창이 반주를 주도하고 가사의 중요성이 높다는 점, 절정부가 약하여 감정을 강하게 표출하지 않고 절제하는 선율 특성을 지닌다는 점, 강하고 크고 화려하고 부유한 세상의 지배질서와는 다소 거리를 둔 약하고 작고 소박하고 가난하고 어린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한다는 점, 가수가 인위적으로 화려하게 꾸민 의상이나 무대매너를 지양하고 소박하고 비상업적이며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포크송은 당시 대도시 중산층 이상 청소년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고, 그에 따라 트로트를 낡은 양식으로 몰아내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이른바 박정희 정권의 유신 말기에 접어드는 1975년에 대마초사건 등으로 포크송의 대표주자들이 활동을 중지당하면서 그 기세는 급격히 수그러들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도 이미 취향이 바뀐 청소년 수용자들이 포크송을 선택했으나, 기세가 꺾인 포크송은 속류화, 상업화되는 경향을 보였고, 이정선, 조동진, 정태춘 등 작품적 완성도를 중시하는 자작곡가수들은 언더그라운드의 길로 접어들어 1980년대에는 해바라기 등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텔레비전을 포기한 채 라디오와 음반, 콘서트 등 언더그라운드 방식의 활동으로 전환했다. 이정선, 조동진, 정태춘 등은 1980년대 초중반에, 대중가요계 주류와는 거리를 둔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따로또같이, 시인과촌장, 어떤날 등의 새로운 포크송 그룹이 탄생하기는 했으나 그리 활발하지 않았고, 오히려 포크송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이들이 록, 블루스, 발라드 등 다양한 양식으로 나아가는 양상을 보였는데 들국화와 신촌블루스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박학기, 장필순, 한동준 등, 포크송의 흐름에 있으면서도 재즈나 발라드와 매우 흡사한 부류의 가수들이 늘어나면서 포크송은 거의 그 양식적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주류 대중가요계에서 포크송의 흐름이 쇠락하는 반면, 오히려 대중가요계의 바깥에서 포크송은 새로운 발전을 하였다. 1970년대 후반 공식적 활동이 불가능해진 비판적 포크 주자 김민기와 한대수 등의 맥을 잇는 서울대 메아리, 이화여대 한소리 등 포크송 동아리가 대학 내에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금지곡이 된 김민기의 「아침이슬」, 「친구」 등은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민주화운동 내에서 새로운 재해석이 이루어지며 민중가요로 그 존재방식이 바뀌게 된다. 따라서 1980년대의 포크송은, 대중가요계가 아니라 민중가요계에서 새로운 발전을 시작하게 되고, 수많은 신작들이 창작되고 널리 불렸다. 1987년 6월시민항쟁을 계기로 이 흐름의 일부는 노래를찾는사람들, 노래마을 등의 그룹으로 대중가요 시장 안으로 들어왔으며, 이로부터 활동을 시작한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등이 1990년대에 솔로로 전환하면서 대중가요계에서는 쇠락한 포크송은 다시 활력을 얻게 된다. 또한 1980년대 내내 대중가요계와 민중가요계를 아우르며 활동한 ᄒᆞᆫ돌이 활동을 계속하였고, 1988년을 계기로 대중가요계에서 민중가요계로 넘어온 정태춘은 「고향집 가세」, 「아, 대한민국」, 「황토강으로」 등 중장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중후한 포크송 작품을 쏟아내며 김민기에 필적할 만한 한국의 비판적 포크송 자작곡가수로서 우뚝 섰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에 이르러 포크송이 한국 대중가요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다. 그러나 인디뮤직 영역에서 브로콜리너마저가 보여주듯, 진지한 성찰의 노래를 부르는 경향은 여전히 포크송의 흐름에 기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