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는 한국 현대의 서민적 노래문화이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주류 노래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지닌 대중들이 기존 대중가요 시장 바깥에서 구전 등의 독자적 유통구조를 통해 향유하는 노래이다. 운동권가요라고도 한다. 1970년대 후반의 민중가요는 기존의 대중가요, 데모노래, 동요, 민요 등을 새롭게 소환한 형태이다. 1980년대 민중가요는 대학생들이 창작한 노래가 대부분이다. 1987년 6월 시민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중가요와 노래운동은 비약적 발전을 한다. 1992년을 기점으로 학생운동·노동운동의 쇠퇴로 민중가요가 유통되고 향유할 수용자 집단도 함께 약화되었다.
대중들이 권력에 저항하여 시위나 집회를 할 때에 노래를 함께 부르는 현상은, 노래가 지닌 강한 공동체성에 미루어 보자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이나 현대의 4 · 19혁명, 이후의 한일수교반대시위 등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의 노래가 불려졌다. 예컨대 4 · 19혁명부터 1970년대 초까지 시위 때 자주 불렸던 「해방가」, 「통일행진곡」, 「삼일절 노래」, 「선구자」, 「훌라송」 등은 그 대표적인 노래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운동의 참가자들이 시위나 집회 때 부르는 데모노래 외에, 일상생활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는 경우는 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가요 등의 상업적 노래문화가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고 학교 교육의 지배적인 힘도 상대적으로 적었을 일제강점기 때에, 야학이나 노동조합, 농민조합, 그리고 항일무장투쟁 대원들이 일상 속에서 불렀을 저항적인 노래들은 그런 점에서 단순한 데모노래와는 구별된다.
마찬가지로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학생운동에서, 단순한 데모노래를 넘어서서, 일상 속에서 저항적인 노래문화가 형성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현상은 노래를 만들고 유포하는 전문인들이 아니라 오로지 수용자 대중들의 자발성에 근거하여 생긴 것이었고, 자신들이 접할 수 있는 노래 중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노래들이 선택되고 불려지고 전파되면서,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는 10월유신과 초헌법적인 긴급조치 등으로 모든 학생 시위 · 집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처벌이 강화된 상황에서, 학생운동이 양적으로 위축된 반면 조직력이나 운동 목표 설정, 학습 수준 등 질적 측면이 심화 · 강화되어 이른바 ‘운동권’이라는 영역이 형성된 것과 관련 있다. 이 운동권에 소속된 학생들은 일상적 문화까지 절제하고 새롭게 창조하고자 했고, 상업적이며 체제순응적인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노래문화를, 기존 음반시장이나 방송과 독립된 유통구조인 구전의 방식을 통해 형성해 나갔다. 민중가요는, 이렇게 기존 대중가요의 유통구조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주도하는 강제적 검열로부터 자유로웠고, 시장이 요구하는 이윤 창출 구조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오로지 수용자들이 원하는 노래가 선택되고 만들어지며 살아남은 독특한 노래문화였다.
1970년대 후반 민중가요에 포함된 노래들은 이미 기존에 존재했던 대중가요, 데모노래, 동요, 가곡, 민요 등으로, 이 시기에 새롭게 민중가요로 소환된 것이다. 「훌라송」, 「농민가」 등 데모노래, 한때 대중가요였으나 금지곡이 된 「아침이슬」 등 김민기의 노래, 「우리의 믿음 치솟아」, 「오, 자유」, 「흔들리지 않게」, 「이 세계 절반은 나」 등 교회운동을 통해 들어온 찬송가와 복음성가, 외국 사회운동에서 불린 노래, 가곡 「기다리는 마음」, 동요 「우리의 소원」, 대중가요 「백치 아다다」, 민요 「아리랑」 등 다양한 원천을 가진 노래들이 민중가요로 포함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학생운동은 양적으로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고,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갖게 된 절망과 고통의 체험을 표현할 새로운 경향의 노래가 필요하게 되었다. 「전진가」(가자 가자), 「임을 위한 행진곡」,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타는 목마름으로」, 「민중의 아버지」, 「전진하는 새벽」, 「선봉에 서서」 등 단조의 비장감과 굳건함을 지니 새로운 경향의 노래들이 1980년대 중반까지 대거 만들어지는데, 이들 노래는 대부분 일반 대학생들에 의해 새롭게 창작된 노래였다. 또한 학생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민중가요도 양적 · 질적으로 성장했다.
바로 이러한 민중가요 성장의 시점에서, 민중가요를 좀 더 전문적으로 담당해줄 전문가 그룹이 필요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포크 동아리로 출발한 대학의 노래동아리들이 1980년을 경유하면서 학생운동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졸업하여 노래모임을 결성하면서 노래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1984년에 서울에서 결성된 노래모임 새벽은 이의 대표적인 집단이며, 대구가 뒤를 이은 후 1980년대 말에 이르면 광주, 부산, 인천, 안산 등 각지에서 노래운동 집단들이 활동하게 된다. 노래운동 집단들은 기존의 민중가요를 정리하여 공연이나 비합법음반을 통해 보급하는 한편, 새로운 민중가요를 창작하였는데, 1980년대 중반에 인기를 모은 「이 산하에」, 「그날이 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이 모두 새벽의 창작곡이다. 이들 노래운동 집단은, 비전문인들이 창작하고 구전으로 유통되면서 이본이 난무하는 민중가요를, 안정된 화성으로 편곡하고 정본을 확정 지으며 가창의 전범을 확립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이들 노래를 비합법음반과 공연을 통해 유포했다. 특히 공연은, 단순히 노래를 나열하여 부르는 콘서트 방식을 탈피하여, 시 낭송과 이미지 영사, 짤막한 연극적 장면 등을 노래와 함께 구성함으로써 일관성 있는 공연물로 만들어내는 등 공연형식의 실험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는데, 1984년 새벽의 「또 다시 들을 빼앗겨」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노래 연주와 공연의 성과는 바로, 전국으로 확산일로에 있던 대학의 민중가요 동아리들에게 빠르게 흡수되었다. 한편 마당극운동으로부터 노래 분야로 진출한 민요연구회는, 유행민요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토착민요를 발굴하고 창작민요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의 활동으로 민중가요의 폭을 넓혔다. 토속민요 「둥당에타령」, 「점아 점아 콩점아」, 창작민요 「광주천」 등은 이러한 성과물이다.
1987년 6월시민항쟁과 7 · 8 · 9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중가요와 노래운동은 비약적 발전을 하여 199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는 민중가요가 수적으로도 가장 풍부하고 다양해진 시기로, 그 양상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80년대 중반까지 대학생이 주도하고 있던 민중가요의 판도가 달라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노동자들이 주 수용자가 되는 이른바 노동가요가 민중가요의 중요한 축을 이룰 정도로 성장한다. 1988, 89년에 김호철 작사 · 작곡의 「파업가」, 「노동조합가」,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딸들아 일어나라」, 「포장마차」, 「끝내 살리라」, 「전노협진군가」 등이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퍼지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이들 노래는 노동자로부터 인기몰이가 시작되어 대학생과 지식인 사이로 퍼지는 전무한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후 노동가요는 1990년대 중반까지 민중가요의 중심적인 흐름으로 자리하였고,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누가 나에게 이 길을」, 「진짜 노동자 3」, 「서울에서 평양까지」, 「바위처럼」, 「희망의 노래」, 「민들레처럼」 등 다양한 질감의 노동가요들이 생산되었다.
둘째, 여태껏 구전과 비합법음반과 반합법적 공연 등, 기존 대중가요 시장 바깥에서만 유통되었던 민중가요가 양적 · 질적으로 확대되어, 1987년 하반기부터는 대중가요 시장 안에서의 활동이 이루어졌고, 이로써 민주화운동 조직과 무관한 일반 대중들이 민중가요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를 대표하는 집단이 노래를찾는사람들이며, 노래마을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은 합법적 공연장에서의 공연과 합법적인 음반 출반으로 이전의 노래운동 집단과는 차별화된 활동 양상을 보였고, 음반 『노래를찾는사람들』 2집(1989)이 무려 80만장이나 팔리는 등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백두산」 등 운동권 대학생들의 노래를 대중적으로 확산시켰고, 「오월의 노래」, 「사계」,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 진 땅에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 등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중가요들도 이들을 통해 널리 인기를 얻었다.
셋째, 노래운동 집단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고 다양해졌으며 역량 있는 창작자들 역시 크게 늘어났다. 정세현이 주도한 광주의 노래패 친구는 「어머니의 손」, 「우리 님은」, 「통일의 나라로 가자」 등 남도 질감이 넘치는 국악이 강화된 색깔을 드러내 보였고, 서울에서 음악대학 졸업자들로 구성된 민족음악연구회는 월북 작곡가 김순남의 「해방의 노래」 발굴, 피아노이중주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 스케일 큰 합창곡 「하나 되는 땅」의 창작 등, 본격음악과 접목된 활동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 시기를 주도했던 노동가요는 노동자노래단, 예울림, 그리고 이 둘이 결합한 꽃다지 등이 전담하였다. 이미 전국의 대학교에는 민중가요를 부르고 공연하는 동아리들이 거의 생겨있는 상황이었고, 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노래운동 집단의 성원으로 충원되었다. 따라서 1980년대 말부터는, 민중가요에서 작자 미상의 신곡의 비중이 줄어들고, 대학교 노래 동아리와 노래운동 집단 소속 창작자들의 창작곡의 비중이 커졌다. 이 시기 대학과 지식인들에서 주로 불린 민중가요의 창작자로는 「전대협진군가」, 「애국의 길」을 지은 윤민석, 새벽의 멤버로 「저 평등의 땅에」, 「선언」을 작곡한 류형수,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를 작곡한 이현관, 「그날이 오면」을 작곡한 문승현, 전국교직원노조의 대표곡 「참교육의 함성으로」를 지은 주현신, 1990년대 이후 발랄하고 밝아진 새로운 대학가 민중가요를 지은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의 이지상, 「처음처럼」의 김민하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노동가요 창작자로 앞서 말한 김호철, 「고백」의 고승하, 「민들레처럼」의 조민하, 「바위처럼」의 유인혁(본명 안석희) 등이 있다. 새벽과 노래를찾는사람들을 거친 안치환도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잠들지 않은 남도」, 「철의 노동자」 등의 인기 민중가요를 지었고, 「그대 눈물 마를 때까지」를 지은 민족음악연구회의 멤버인 류형선 등도 이 시기의 작곡자이다. 또한 본격음악계의 작곡가인 서울대 교수 이건용도 「배웅」 등을 작곡하며 민중가요를 풍부하게 했다.
1992년을 기점으로 학생운동이 쇠락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커져 약화되면서, 민중가요가 유통되고 향유할 수용자 집단도 함께 약화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노동가요는 투쟁적인 행진곡들이 위축되고 위로와 성찰의 태도를 담은 「창살 아래 사랑아」, 「전화 카드 한 장」 등이 유행하는 한편, 세대가 바뀌면서 달라진 취향을 반영하여 록음악을 수용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천지인, 메이데이, 조국과청춘 등의 노래운동 집단이 록을 수용한 민중가요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중가요의 수용자 집단은 더 이상 강화되지 않았고, 학생운동 조직과 노동조합 등의 일상 속에서 불리는 민중가요는 더 이상 살아남기 힘들어졌다. 따라서 민중가요는 시위와 집회 때 부르는 투쟁적인 행진곡들만 불리며 살아남는 양상을 보였다. 다른 한편, 전문적으로 노래를 짓고 부르는 노래운동 집단은 서울의 꽃다지와 우리나라, 부산의 일터 정도를 빼놓고는 모두 와해되고 창작자와 가수들은 개인으로 인디음악의 방식으로 활동하였다. 노래를찾는사람들 출신으로 일찌감치 대중가요 가수의 길을 택한 안치환이 민중가요적 성향을 유지하며 대중가수로 안착했다면, 여전히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담은 노래를 짓고 부르는 이지상, 손병휘, 연영석 등 자작곡가수는 인디뮤직 방식으로 활동한다. 또한 한때 인터넷 사이트 송앤라이프를 운영하며 인터넷에서 인기를 누릴 수 있는 풍자적인 노래를 지은 윤민석의 활동도 주목할 만했고 「헌법 제1조」 같은 새로운 인기곡이 탄생했지만 2010년대로 넘어오지는 못했다.
민중가요는 철저하게 수용자들의 자발성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된 문화였다. 시위와 집회에서의 한정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데모노래를 넘어서서, 대중가요를 대체하여 다양한 정서와 양식의 노래를 일상공간에서 듣고 부르고 즐기는 독자적인 노래문화, 검열과 시장의 이윤 창출 구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인기 여부가 오로지 수용자들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노래문화였기 때문이다. 흔히 전문가 집단인 노래운동 집단이, 민중가요를 만들어 대중들에게 유포시키고 이끌었으며, 민중가요의 존립과 성패 역시 노래운동 집단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반대로, 전문적 예술운동 집단이 선행하지 않은 채 수용자가 스스로 만든 민중가요 문화가 먼저 형성된 후, 이 기세에 떠밀려 전문가 집단의 움직임인 노래운동이 형성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민주화운동과 함께 했던 진보적 예술문화 중 이런 경우는 노래 분야가 유일한데, 이는 노래가 지닌 일상성 때문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민중가요 문화는 늘, 어느 집단에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자적 노래문화를 형성하고 유지시킬 수 있을 정도로, 공동체적인 집단적 문화 창조 역량을 지닌 수용자 집단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중가요의 흥망성쇠의 가장 큰 동인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따라서 늘 지속될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 1970년대 후반부터 20년이나 지속된 이러한 문화적 경험과 그 성과물은, 한국의 노래문화는 물론 한국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