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마디의 2박자 단조의 노래이다. 단조 트로트의 핵심적 특징인 ‘라시도미파’의 5음계를 사용하고 있으며, 현악기가 주도하는 관현악 반주가 중심을 이루는데 전주는 기타가 주도한다.
1963년 동아방송의 라디오드라마 「동백아가씨」(추식 작)의 리메이크 영화인 「동백아가씨」(1964) 주제가로 창작되었다. 드라마와 영화는, 남쪽 섬마을의 처녀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과 사랑하여 미혼모가 되고 재회 · 이별하는 내용으로, 1960년대 말에 유행하는 신파적 감수성의 미혼모 소재 영화의 시발 지점에 놓여있다. 대중가요 「동백아가씨」 역시, 고통을 인고하며 눈물 흘리는 신파적 감수성을 지닌 단조 트로트의 작품으로 1960년대 후반 트로트의 부활을 이끌었다. 1960년대 초 한국대중가요는,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트로트의 주류 흐름이 쇠락하고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대표되는 스탠더드 팝 경향의 작품이 주도하여 미국풍 대중가요의 바람을 일으킨다. 이는 최초의 시민혁명인 4·19혁명과 경제개발을 내세운 5·16군사정변을 계기로, 서양적 산업화 · 도시화에 대한 낙관과 희망을 반영한 현상이다. 이 기간 동안 다소 침체한 트로트가 「동백아가씨」의 인기를 힘입어 다시 부활했고, 1970년대 초 배호, 조미미와 남진 · 나훈아의 인기에 이르기까지 트로트의 새로운 전성기가 열리게 된다. 이미자는 이 노래와 함께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 트로트 곡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이 흐름의 대표주자가 되었으며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호칭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1965년 5개 방송국에서 왜색가요를 정화해야 한다는 이유로 출연금지 결의를 하게 되며 이를 계기로 왜색가요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방송사의 사과로 이 문제는 일단락지어진다. 1966년 이 노래는 일본에서 일어로 취입되고 방송되는 등 한일수교의 문화적 상징으로 부상하지만, 결국 1968년 2월 왜색을 이유로 방송금지가 되고 차츰 음반 발매도 이루어지지 않다가 1975년 6월 정부의 ‘공연활동의 정화정책’에 따라 공식적인 음반 금지곡이 되었다.
1987년 6월시민항쟁 이후 「동백아가씨」는 방송과 음반 모두에서 해금되었고, 이미자의 대표곡으로 음반과 공연 등으로 복귀했다.
1960년대 중반 「동백아가씨」의 히트는, 1960년대 초에 과도하게 부풀어 오른 서양적 근대화의 낙관적 태도에 잠시 밀려있던, 패배주의적인 신파적 비애의 감수성이 재부상한 현상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주류 양식인 트로트의 부활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한일수교를 계기로 가속화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한 일본풍 대중가요의 새로운 유행을 우려한 문화 엘리트들의 경계로 금지곡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