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0년(공양왕 2) 12월에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본향인 화령부(和寧府,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작성하였다. 영흥의 준원전(濬源殿)에 보관되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훼손되었던 것을 1731년(영조 9) 한양(漢陽)의 표구(表具) 장인을 영흥으로 보내 두루마리로 만들었으며, 1934년에 봉모당(奉謨堂)에 옮겨 보관하였다가 지금은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종이는 저지(楮紙)로, 단편(斷片) 8장을 연결하여 1폭의 두루마리로 만들었다. 단편 1장은 세로 56㎝, 가로 50㎝ 내외이고, 8폭 전체는 3.86m이며, 표구된 족자는 4.7m × 75.1㎝의 크기이다. 각 폭마다 3∼7개의 도장이 찍혀 있다.
첫째 폭은 1390년(공양왕 2) 12월에 화령부(和寧府)의 호적 대장(戶口柱帳)에 의거하여 발급해 준 것인데, 이성계의 노비호(奴婢戶)가 기재되어 있다. 둘째 폭은 1390년 8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출납(出納)에 의거한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의 출납인데, 그 내용은 호적 대장의 작성 규정인 호적사목(戶籍事目)이다. 셋째 폭 이하는 이성계와의 관계가 확실치 않은 40호(戶)의 호적을 기재한 것이다.
한편, 이 자료와 관련하여 규장각에 소장된 『용흥성적(龍興聖蹟)』의 말미에는 “ 선원전(璿源殿)에 보존되었던 태조 즉위 전의 호적과 태종(太宗) 잠저(潛邸) 시의 호적사목을 1731년(영조 7) 왕명으로 경공(京工)을 보내어 성축(成軸)하게 하고 칠궤(漆櫃)에 넣어 보장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현재의 두루마리 상태가 바로 이때에 성축된 것임을 알려 준다.
이 문서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인 고려 말기 1391년(공양왕 3)경에, 함경도의 화령부에서 작성된 이성계 호적의 일부로 추정되는 단편 문서로서, 국보로 지정된 고문서이다. 이는 모두 여덟 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폭에는 이성계의 당시 관함(官銜) 및 식봉(食封)과 이성계 소유의 노비 명단이 적혀져 있다. 제2폭에는 호적 작성의 방침 및 호구성적(戶口成籍)을 위한 세부 지침 외에 태종 이방원(李芳遠)의 이름도 쓰여 있다. 그러나 그 어느 폭에도 이성계의 내외 조상(祖上), 자질(子姪), 형제자매, 여서(女壻), 동거 가족 등의 기재는 보이지 않는다. 제3폭 이하에는 실제로 성적(成籍)된 약 40호의 호적 내용을 보여 주고 있는데, 여기에 보이는 호구들은 ‘이성계의 식실봉(食實封) 300호의 호구’ 내에 속한 호구일 것으로 짐작된다. 『북관읍지(北關邑誌)』(1872년 간행)에 따르면 현재의 제1 · 2폭이 옛날에는 제7폭에 함께 자리 잡고 있는 듯하고, 또 『준원전고사록(濬源殿故事錄)』(현재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소장)에 따르면 현재의 제2폭이 영조(英祖) 때 새로이 장축(裝軸)하기 직전에는 제5폭의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서는 각각의 호(戶)가 시작될 때마다 별행(別行)으로 기록하고, 호주임을 뜻하는 ‘戶’ 자를 굵은 글씨로 써 놓았다. 다만 호의 소재지는 기록이 생략되어 있다. 호적 기재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호주 및 그의 4조와 모(母), ②호주의 처 및 그의 4조와 모, ③호주의 직계 비속(호주의 아들과 며느리, 딸, 사위), ④호주의 친형제와 그의 처 및 친자매와 그의 부(남편), ⑤호주의 이부(모) 형제와 그의 처 및 이부(모) 자매와 그의 부(남편), ⑥호주의 노비의 순으로 기재하는 식이다. 단, 지체가 있는 양민일 경우에는 세계(世系)의 범위를 더 넓게 추심(推尋)하여 호주의 ①조처(祖妻), ②증조(曾祖), ③증조처(曾祖妻), ④외조(外祖), ⑤외조처(外祖妻), ⑥처부(妻父), ⑦처외조(妻外祖), ⑧처외조처(妻外祖妻)의 각 4조(四祖)까지 기재하였다. 또 매 호구의 말미에는 호구 작성에 참고한 증빙 문서를 주기(注記)해 놓았는데, 증빙 문서가 없는 경우에는 구두 신고에 기초하여 작성하였다는 취지를 밝혀 놓기도 하였다.
이 호적 관계 자료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의 기록으로 당시의 호적 제도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말의 것이지만, 원본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일본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서원경(西原京, 지금의 청주)의 상황을 적은 신라장적(新羅帳籍)이 수취와 관련된 통계 자료라면, 이 문서는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개인 호구 장적이다. 이 고문서에 나타난 호적의 기본적인 기재 방법은 조선시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어 있는 ‘호구식(戶口式)’에 반영되어 있다.
이 문서는 당초 성책(成冊) 형태의 문서로 작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흩어진 나머지 그 잔편만 남아 있게 된 데다 그 잔편마저도 글자가 뭉개지거나 찢겨나간 곳이 많기 때문에 문서의 전모를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고려시대의 호적 자료 중 현전되는 유일한 문서로서, 고려 말 호적 체계와 호적 작성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일 뿐 아니라, 역사학 · 언어학 · 사회학 · 인류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 연구에도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