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서구, 서쪽으로는 강서구와 접한다. 남쪽으로는 남해에 연하며, 북쪽으로는 사상구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56'∼129°00', 북위 34°52'∼35°08'에 위치한다. 면적은 41.75㎢이고, 인구는 33만 7781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6개 행정동(8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부산광역시 사하구 당리동에 있다.
금정산맥 말단부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 해안지역은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고, 북서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소규모의 침식 곡저평야가 발달하였다. 서쪽에 흐르는 낙동강 하구 유역은 하천 퇴적지형으로 을숙도 · 일웅도 등의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다. 장림동과 다대동에 이르는 하천 연변은 낙동강에서 운반되는 토사가 퇴적되어 삼각주가 계속 형성되고 있다.
당리동에 소재한 승학산(乘鶴山)은 당리동과 사상구 엄궁동의 경계를 가르고 있다. 또한승학산은 부산의 등줄산맥인 금정산맥 남쪽 말단부에 솟은 산으로 북동쪽으로 구덕산과 이어지고 남서쪽으로는 신평의 동매산을 지나 몰운대의 몰운산과 연결된다. 전형적인 노년산지로 산정은 종순형이나 산록은 비교적 가파른 것이 특징이다. 지명은 고려 말 무학대사가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산세를 살피다가 이 산의 형상이 학이 웅비하는 듯 하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대동에 소재한 두송산(頭松山)은 승학산에서 봉화산을 지나 남쪽으로 뻗어 내린 두송반도 끝에 자리 잡은 산이다. 구릉에 가까운 산이나 사면이 급하고 짙은 송림으로 덮여있어 사람의 왕래가 쉽지 않다. 두송산은 다대포의 자연방파제로서 동남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몰운산 · 금티산과 함께 병선을 만드는 재료를 조달하는 경상좌우영 관할의 봉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다대동에 소재한 몰운산(沒雲山)은 몰운대 정상부의 산지이다. 구릉에 가까운 산으로 산정부분이 종순형으로 되어있고 사면 또한 완만하나 산기슭의 끝부분은 단애를 이룬다. 산전체가 짙은 송림으로 덮여있다. 옛부터 경승지의 하나로서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앞바다는 다대8경 중의 하나인 “몰운관해”를 이룬다.
감천동에 소재한 금티산(金峙山)은 괴정동 · 신평동 · 구평동과의 경계를 이룬다. 천마산 · 아미산과 함께 감천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여러 계곡이 발달하여 있다. 장림동에 소재한 감나무골은 바깥 장림에 있는 골짜기이다. 지명은 감나무가 많다 하여 유래되었다. 괴정동에 소재한 새리골은 괴정천 상류에 형성된 골짜기로 지금의 동주대학교와 사하도서관이 있는 골짜기이다. 사리곡 · 사리골이라고도 불리며, 괴정천의 발원지이다.
괴정동을 관류하는 괴정천은 구덕산 남쪽의 시약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괴정 · 당리 · 하단동을 차례로 관류하면서 낙동강 본류로 흘러드는 도심하천이다. 상류는 경사가 급한 계류하천으로 ‘세리골’을 형성한다. 중류는 반월형으로 괴정동 시가지를 감싸고 흐르면서 침식분지를 형성하고, 하류는 승학산에서 발원한 당리천과 함께 좁고 긴 하곡평지를 이루고 있다.
당리동을 흐르는 당리천은 구덕산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당리동 시가지를 관류하다가 하단1동에서 괴정천과 합류하는 도시하천이다. 옛 지명으로 제설골거렁이라고도 불렸다. 상류는 승학산과 산불량 사이의 깊은 골짜기인 제석골을 따라 흐르면서 흐름이 빠른 계류천을 이루지만 당리 시가지를 지나 괴정천에 합류하는 하류에서는 하상구배가 완만한 망상하천을 형성한다.
다대반도 동남쪽에는 두송반도가 있어 서쪽으로는 다대만, 동쪽으로는 서구의 암남반도와 감천만을 이룬다. 해안지역은 대부분 급경사의 암석해안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말단부에는 사주 발달로 육계도가 된 몰운대에 사빈해안이 있다. 도서로는 경도(고래섬) · 쥐섬 · 솔섬 등이 있다.
감천동에 소재한 감천만은 과거에 감내포, 대포만이라고도 불렸다. 남쪽으로 대한해협에 뻗어 내린 송도반도와 두송반도 사이의 좁고 긴 만으로서 폭은 만의 입구가 1.3㎞이고, 내만은 1.5㎞에 이른다. 본래 이 만은 청어 · 고등어 · 멸치 등이 많이 잡히는 어장(소금골 어장 · 호수암 어장)이었으나 1970년부터 부산항의 보조항으로 개발되면서 만의 입구에 1.15㎞에 이르는 방파제와 5.57㎞의 안벽 및 물양장이 건설되는 등 현대적인 항만으로 변모하였다.
다대포에 소재한 다대만은 두송반도와 몰운섬 사이에 있는 포구로 입구가 길이 1.7km이고 내만은 너비가 약 2.0km이다. 반월형을 나타내는 이 포구는 내만이 모래 또는 자갈해안으로 되어있고 반구 쪽으로 갈수록 수심이 깊어진다. 일찍부터 멸치가 많이 잡히는 어장으로서 내만의 갯마을은 신석기로부터 어로 활동의 중심이었다. 낙동강 하구가 되어 토사가 다대포 서쪽바다의 강을 메워 몰운대 북쪽지대에 다대포해수욕장이 발달되었다.
사하구와 연한 여러 해안에는 섬 지형들이 발달되어 있다. 다대동에 소재한 나무섬은 몰운대에서 남쪽으로 약 5.5km 떨어져 있다. 갯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은 섬의 북쪽이며 해발 61m에 이른다.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3개의 작은 섬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며 섬의 주위는 해식애로 되어있다. 다대포 멀리 남쪽에 있다 하여 남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대동에 있는 고리섬은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다대8경의 하나인 쥐섬, 솔섬과 함께 3도 중 하나로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갯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많은 낚시꾼들이 이용하고 있다. 해안가에는 많은 섬들이 있었으나 도시화로 연육되거나 매립되어 없어졌다.
감천동에는 용두섬이 있었다. 감천만 동북쪽에 조그마한 섬으로 1962년 부산화력발전소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바다 매립을 위한 착평으로 없어졌다. 다대동에는 과거 몰운도라는 섬이 있었으나 지금은 연육되어 있다. 부산에서 태종대, 해운대와 함께 뛰어난 경승지를 지니고 있다. 감천동에는 죽도가 있었다. 두송반도의 기반암 나출암인 용두암의 앞에 자리 잡고 있었던 작은 갯바위섬이었다. 1979년 감천항개발사업으로 인하여 섬의 자취는 없어졌다.
사하구 지역은 바다에 연해 있어 온대해양성기후를 보이고 있으며 기온의 연교차가 비교적 적다. 봄철에는 양자강 부근에서 발생한 저기압의 잦은 통과로 비가 자주 내린다. 6·7월에는 장마전선의 영향을 받고, 그 이후 고온다습한 날씨가 나타난다. 겨울철에는 대륙성고기압의 영향으로 한랭하고 북서계절풍이 불지만 다른 지방에 비해 비교적 온난하다. 연평균기온은 14.9°C, 8월 평균기온 25.2°C, 1월 평균기온 2.8°C로 비교적 온화한 편이고, 연중강수량은 1386.5mm이다. 상대습도는 59.9%, 평균풍속은 3.1㎧이다.
다대포 · 괴정동 패총(조개더미) 등의 유적은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이 지역에 주거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괴정동과 감천동 등에서 발굴되었는데, 괴정동에서는 반달돌칼 등의 간석기와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감천동에서는 고인돌이 다수 발굴되었다.
그리고 철기시대의 유적은 괴정동패총 · 하단동패총 · 신평동패총 · 괴정동고분군 등에서 발굴되었다. 이렇게 낙동강 하구의 줄기를 따라 형성된 유적지를 통해 볼 때 사하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주거지로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사하지역은 동래군에 속하였다. 『고려사』에는 후백제의 왕인 견훤이 사신을 보내어 절영도 명마 한 필을 태조 왕건에게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절영도가 후백제의 지배영역이라는 것을 고려에 과시하려는 전술이었다. 즉 후삼국시기에 사하지역을 포함한 부산포 일대가 후백제의 지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사하지역은 지리적 위치로 보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동평현 영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이 잦아지면서 동래현은 동래군으로 승격되었고, 동평현은 동래군에 이속되었다. 이에 사하구도 동래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09년(태종 9)에 다시 양주에 영속되었다가 1428년(세종 10)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다. 이 시기 사하지역은 대일방어상 중요한 군사지역이었다. 경상도의 좌도수군안무사가 수군절도사로 바뀌면서 좌수사영 관하에 부산포진관이 설치되고 그 밑에 10개의 만호영을 두었다.
다대포영은 1490년(성종21) 11월 둘레 1806척, 높이 16척의 석성을 쌓았다. 그 뒤 다대포영은 만호영에서 첨사영으로 승격되었다. 『징비록』에 의하면,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적은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현 사하구구평)와 다대포를 함락시켰다. 이때 다대포첨사 윤흥신은 적을 막아 힘써 싸우다가 죽음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 사하지역은 사천면에 속하였다가 하단과 상단으로 분리되면서 하단은 신초량리 · 구초량리 · 대치리 · 목장리 · 감천리 · 독지리 · 장림리 · 서평리 · 다대리 등 9리로 편재되었다. 하단이 중구 · 서구 · 사하구 지역에 해당되며 신 · 구초량리를 제외한 지역이 현재의 사하구 일대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는 1910년 조선총독부 관제시행으로 동래부가 구역변동 없이 부산부로 변경되어 지금의 괴정 · 하단 · 신평 · 구평 · 감천 등의 낙동강 하구지역이 부산부 관할이 되었으며, 이후 이 지역을 사하로 통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산부의 일부가 기장군과 통합되어 동래군이 신설되었는데, 지금의 사하지역이었던 사하면은 다시 동래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42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사하면은 부산에 편입되어 부산부의 사하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광복 후인 1957년에는 구제실시로 서구 사하출장소로 바뀌었다. 부산의 도시산업화와 항만산업의 발달로 사하구도 급속히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감천만이 부산 북항의 보조항만이 되고, 다대포에도 항만시설이 들어섰다. 1975년 시 직할 사하출장소로 독립하였으며, 1983년 사하구로 승격하였다. 1987년 낙동강 하구둑이 건설되었고, 1994년 지하철 1호선의 연장개통으로 부산 외곽지역과 도심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하였다. 또한 신평 · 장림공단 등이 입지하여 부산 경제의 중심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법정동으로 당리(堂里) · 괴정(槐亭) · 하단(下端) · 신평(新平) · 감천(甘川) · 장림(長林) · 다대(多大) · 구평(舊平)동 등 8개 동이 있다.
선사유적지인 지석묘, 패총, 분묘군 등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감천동에는 지석묘가 모두 6기가 있었는데, 감천화력발전소 건설과 도로공사로 상세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감천동 지석묘는 대부분 남방식 지석묘였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출토된 마제석검이나 근처에서 수집된 유구석부 등을 생각한다면 대략 서기전 4~3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신평동과 다대동에는 패총이 있다. 신평동 앞의 구릉인 속칭 조개모래에 패총(조개무지)이 형성되어 있었다. 원래는 꽤 큰 패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석회 공장에 패각층이 매각되어 패각층이 없어지고, 그 후 공장부지로 조성되어 유적 자체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곳에 적갈색 연질토기 수편이 채집된 점으로 보아 철기시대의 패총일 것으로 추정한다.
다대동의 패총은 낙동강 하구의 다대포해수욕장과 연결되어 있는 몰운대 입구에 있던 패총이다. 출토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이 유적의 중심연대는 대개 남부지방 신석기문화 중기에 해당하며 그 성격은 영도구에 소재한 동삼동조개더미의 4층~3층 단계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괴정동에도 패총이 발견되었다. 패총 층위 중 상층은 이른바 김해식 토기편과 회청색 토기편이 나왔는데 대체로는 회청색의 신라토기편이 위에 깔려 있었다. 이것은 뒷산에 이어지는 괴정동고분군의 토기와 일치한 것으로 기원 후 늦게까지 나타나는 것이다. 그 밑인 아랫면에는 회청색 토기에 섞여 적갈색의 김해식 연질토기가 나타나고 있다. 형태는 다양하나 다른 김해문화기 패총의 것과 유사하다.
괴정동에 소재한 고분군은 1975년 유물이 노출되면서 발견되었다. 구덕산 줄기 남단에 연결된 해발 80~90m 정도의 나지막한 구릉에 소재한다. 이 고분군은 부산 사하구 지역의 알려진 고분군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며 또 낙동강 하류지역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고분유적이다. 따라서 5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의 부산지방 고분들과의 상호관계는 물론, 낙동강 하류지역 고분문화의 전반적인 성격규명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다대동에 소재한 윤공단(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은 임진왜란 때 순사한 다대첨사 윤흥신공과 군민의 영령을 모시기 위해 1765년(영조 41) 다대첨사 이해문이 설치한 것이다. 윤공이 순사하였다고 알려져있는 다대객사 동쪽(현 다대초등학교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윤홍신의 전적은 1761년(영조 37)에 경상감사 조엄이 윤공의 전적이 자세히 기록된 문헌을 입수해 조정에 포상을 청함으로써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
정운공순의비(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는 몰운대 서남쪽 정상인 다대동에 화강암으로 세워졌다. 정운은 1592년 9월 1일(음력) 벌어진 부산포해전에서 일본군선 약 500척과 싸워 10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로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으로 용전하다가 부산포에서 순절한 녹도만호이다. 1798년(정조 22) 정운공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졌는데, 비문은 이조판서 민종현이 짓고, 훈련대장 서유대가 쓴 것이다.
사하구와 관련이 있는 문화유산으로 다대첨사영갑주가 있다. 다대포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첨사영을 몰운대로 이전 · 복원할 때 발견되었는데, 이 갑옷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대항하여 순사한 다대첨사 윤흥신의 제향 때 제복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구조로 보아 실전용과 예복을 겸한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이다. 갑옷은 겉 · 안 · 속의 세 겹으로 구분되고 속에는 화살, 칼 등 방패용 동판 994개가 고기비늘같이 엮어져 있으며, 외부는 원형동판으로 장식되었다. 제작연대는 불확실하나 18세기 중반에 제작되어 보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복식사 연구 및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자료로, 현재 충렬사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하구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전략 요충지이면서 대일방어상 주요 관방지였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다대포성지와 서평포진이 있다. 조선시대 다대포에는 첨사영과 함께 성이 축조되었다. 다대포진영은 1490년(성종 21) 11월 축조되었다. 당시 규모로는 석성으로 주위 1860척, 높이 13척으로 기록되어있다. 그 위치는 오늘날의 다대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성종 때 축성한 성은 임진왜란 때 허물어졌으며, 다시 수축한 성은 수군영이 1895년 혁파되기 이전까지 존속하였다. 당시 이곳에 있던 객사는 1970년 몰운대로 이건되었다. 1972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객사는 본래 첨사영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본래 위치는 지금의 다대초등학교 남쪽 정문 서편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평포에 있던 서평포 만호영은 다대진 직할의 만호영이었다. 지금의 구평동에 소재하였으며 토성이 축조되어 있다. 이를 구평의 옛이름인 서평성이라 했으며, 구평동 바닷가를 성이 있는 개라 하여 예부터 성개 또는 성포라고도 했다.
이들 성지 외에 사하구에서는 여러 관방유적이 있다. 감천동에 소재한 성지는 지금의 부산화력발전소 뒤쪽 꽃마을에서 장림까지 걸쳐있는 토성과 석성이 혼축된 성이다. 조선시대에 개축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쌓았다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보아 축성시기는 신라 말기까지로 추정된다.
다대동의 응봉에는 봉수대가 있다. 지금의 다대포동(본동) 북쪽의 아미산에 있는 봉수대이다. 이곳은 수군진영이었던 다대포진과 서평포진을 내려다보며 낙동강 하구 일대와 몰운대 앞바다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요처였으며, 직봉 제2로의 기점이기도 했다. 현재 석축의 흔적을 따라 복원 되어 있다.
괴정동에는 조선시대 국마를 키우던 목장이 있었으며 목장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당시 절영도의 목장과 함께 규모가 큰 목장이 있다. 석축으로 된 이 성은 현 대티고개에서 시작하여 당리뒷산까지 약 3㎞로 이어지는데, 그중에서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곳은 현재 희망촌 동쪽 산록에 있다. 지금도 희망촌 일대를 마꼴이라고 부르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7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 15개교와 동주대학교, 동아대학교 제2캠퍼스가 있다. 동아대학교 제2캠퍼스는 1985년 동아대학교가 하단 지역에 캠퍼스를 조성하여 대학본부와 문과대학 건물을 준공하여 이전하면서 자리 잡게 되었다. 1987년 하단캠퍼스를 승학캠퍼스로 개명하였으며, 대학의 주캠퍼스로 이용되고 있다.
괴정동에 소재한 동주대학교는 1978년 동주여자실업전문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하였으며, 1998년 동주대학으로 개칭되었고, 2011년 동주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사하구 하단동 을숙도에 위치한 을숙도문화회관은 부산 서부와 낙동강유역 주민들의 문화활동의 중심기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2003년 개관하였다. 대공연장, 소공연장, 전시실, 문화강좌실, 연습실, 야외놀이마당, 조각공원 등을 갖추고 있다. 을숙도문화회관 주변지역은 갈대밭, 조각공원, 연못쉼터 등의 수려한 경관을 갖추고 있다.
다대동에는 주요 어로민속이면서 1987년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된 다대포후리소리가 있다. 다대포는 예로부터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온 어촌이다. 현 주민 중 토착민이 3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약 20여 년 전까지 거의 멸치지예망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며, 따라서 이 지역은 멸치잡이에 관한 어로요를 비롯하여 이에 부수하는 어로풍속을 다른 지방보다 많이 간직하고 있다.
다대포후리소리는 이 지방 대표적인 민속이다. 민요를 멸치잡이 후리작업의 순서에 따라 부르는 소리에 작업의 동작을 곁들여 입체화한 것이다. 후리질의 시작은 멸치떼가 들었다는 신호인 징소리에 비롯된다. 다대만의 동쪽의 속칭 낫개와 다댓개 사이에 있는 언덕 위를 야망대라 하는데, 해질 무렵 망대로 올라가 멸치 떼의 동정을 살피다가 어조가 보이면 낫개로 내려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확인하고는 징을 친다. 모인 어민들은 맨 처음, 그물을 다 치면 어장(해변)에서 벼릿줄을 당긴다. 어장까지 당기고 그물의 고기를 털어 모으면 아낙네들이 소쿠리로 멸치를 퍼 나른다. 마지막에 풍어놀이를 하고 파한다.
강서구의 여러 자연마을에는 당산이 많다. 감천동에는 하당, 산재당, 옥녀당산, 산제당, 다대동에는 주산당산, 홍티당산, 당리에는 제석할매당 등이 있다.
다대포후리소리는 후리라는 큰 그물로 넓게 둘러치고 여러 사람이 벼리의 두 끝을 끌어당기면서 부르는 소리(노래)이다. 이 후리소리는 풍어를 비는 당산제(堂山祭)부터 시작되어 풍어를 노래하는 끝소리까지 8과장으로 되어 있다. 이 후리소리가 자취를 감춘 것은 1950년 후반, 바다의 치어(稚漁)까지 잡는다 하여 지예망어업이 금지되었기 때문인데 그때 사람들이 아직 생존해 있어 후리소리가 채록(採錄) 되었다.
후리소리는 당산제(堂山祭), 용왕제, 그물을 옮겨 배에 싣는 소리, 그물 놓는 소리, 그물 당기는 소리, 그물 터는 소리, 가래소리, 풍어소리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대포후리소리는 대부분 4박자로 되어 있다. 가사, 곡조, 동작이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전승되어 있어 보존가치가 높다.
농업은 다대반도 일대의 산록 텃밭에서 소규모로 행해지며 주로 소채류를 생산한다. 어업은 다대포와 감천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다대만의 동안은 어류 · 해조류 · 성게류 등이 많이 잡힌다.서안은 합판 생산을 주로 하는 공업지대가 발달하였다. 감천만은 부산항의 보조항 역할을 하고 있는데, 항만시설이 들어서기 이전만 해도 이곳은 전형적인 어촌이었다. 감천만 감내포 앞에는 마당더기, 조금몰, 호수암어장이 있어 멸치잡이가 성하였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는 화력발전처가 들어서 있다. 1964년 제1·2호기, 1969년 6월 4일 제3·4호기가 준공되었다. 1996년 부산화력발전처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6년 법정공단으로 지정된 장림동 · 신평동 일대의 장림 · 신평공업단지는 도시 내 공해발생도가 높은 제조업체를 이전시켜 집단화한 임해공업단지이다. 현재 수산물가공업 · 의류업 · 기계업 등의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공단이 입지하면서 낙동강 하구의 주변 마을은 공업단지 마을로 발전하였다.
한편 구평동에는 조선시대 5일장인 독지장이 있었다. 『동래부읍지』(1832) 방리조에 보면 “사천면의 독지리를 관문에서의 거리 43리라 하고, 서평리를 관문에서의 거리 49리”라 한 것으로 보아 독지장은 오늘날의 구평동 북쪽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월 1·6일 개시되었다.
교통은 1973년 서구와 연결되는 대티터널 개통으로 부산도심과의 통행이 편리해졌고, 1987년 부산시의 공업용수와 도시용수 공급을 위해 건설된 낙동강 하구언이 하단동-을숙도-명지와 연결되면서 외부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하여 졌다. 1994년 지하철 1호선이 연장 개통되었다.
또한 낙동로와 다대로 · 감천로 등이 건설되면서 지역간의 교통이 원활히 이루어져 쾌적한 생활주거지로 변모되었다. 사하구 내의 중심 교로는 하단 오거리가 있으며, 이 곳은 사하구의 중심을 이룬다.
한편 낙동강 하구둑은 1983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87년 11월에 완공되었으며, 길이는 2.23㎞에 이른다. 이와 함께 4차선 도로가 건설되어 부산-진해간의 거리를 약 10km 단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으로 과거 다대포팔경으로 유명하였다. 다대포해수욕장과 몰운대, 낙동강 신삼각주와 에덴공원 등은 인근의 을숙도 · 일웅도를 중심으로 한 철새도래지와 결합해 좋은 관광자원을 이루고 있다. 다대동에 소재한 몰운대(부산광역시 기념물, 1972년 지정)는 금정산맥의 끝자락이 대한해협으로 빠져들며 형성된 하나의 섬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몰운도라 불리는 섬이었으나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흙과 모래가 쌓여 다대포 육지와 연육된 전형적인 육계도이다. 남쪽 끝은 파도 침식에 의해 해식애와 해식동이 발달되어 있고, 배후인 육지 쪽에는 다대포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인 대마등도 · 장자도 등을 볼 수 있고, 남쪽 바다 쪽에는 남형제도 · 북형제도 · 목도외에 동호섬 · 쥐섬 · 모자섬 · 오리섬 · 자섬 · 동섬 · 팔보섬 등이 있다.
또한 부산광역시 기념물인 정운공순의비가 위치해 있으며, 1972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다대포첨사영의 다대포객사 건물이 옮겨져 있다. 화손대는 몰운대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지금은 몰운대로 함께 일컫는다.
사하구의 대표적인 관광지는 을숙도이다. 사하구 하단동에 속한 섬으로 낙동강물이 흐르면서 하구에 모래가 쌓여 형성된 삼각주이다. 이곳에 서식하는 철새를 보호하기 위해 1966년에 을숙도를 포함하여 사하구 다대동에서 장림동, 하단동을 경유하여 북구 금곡동에 이르기까지, 또 서쪽으로 강서구 명지동과 가덕도동을 포함한 낙동강하류 일대의 공유수면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천연기념물, 1966년 지정) 이 일대의 철새 도래지는 약 50여 종, 10만여 마리의 철새들이 쉬어 가는 철새들의 낙원으로 알려지면서 관광명소가 되었다.
한편 사하구 지역은 과거부터 멸치잡이가 성하여 멸치젓이 유명하였다. 현재 대명목재의 목재가 저장되어 있는 앞바다에서 멸치가 4월에서 7월까지 잡혀 지예망(후릿그물)어업이 성하였다. 지예망어업은 바다에 그물을 치고 육지에서 잡아당겨 고기를 잡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 잡은 멸치를 마른 멸치로 만들어 타지에 내는 것도 많았으나 젓갈로 담아 타지로 내는 것도 많았는데 그 멸치젓이 1940년도까지 유명하였다. 이곳에 멸치가 많이 몰려든 것은 낙동강 민물이 바닷물과 섞이는 곳이어서 플랑크톤이 풍부한 데 있었다.
매년 축제로 부산국제락페스티발과 해넘이축제가 열리고 있다. 부산시 주관으로 매년 8월 열리고 있는 국제락페스티벌의 시작은 1999년 제4회 부산바다축제의 개막행사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었던 아시안락페스티벌이었다. 이어 2000년도에 제1회 부산국제락페스티벌이 7월에 광안리해수욕장에서 개최되었으며 이후 최대 백사장을 보유하고 있는 다대포해수욕장에서 개최되고 있다. 다대포해넘이축제는 2003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매년 12월 31일에 한해를 보내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을숙도에는 물홍보관이 있다. 이 전시관은 하구둑에 방문하는 내방객들에게 공사현황과 물의 소중함을 홍보하기 위해 1988년에 완공되었다. 연면적은 244평으로 106평 규모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전시실에는 물과 관련된 홍보판넬이 설치되어 있으며, 조류와 어류의 박제도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하구둑이 설치되기 이전 을숙도 부근에서 서식하던 생물들이 전시되어있다.
대표적인 해수욕장으로는 다대포해수욕장이 있다. 이 해수욕장의 백사장 모래는 낙동강 상류에서 퇴적된 천연의 사장이다. 1970년대에 개장하여 전국적으로 이름난 해수욕장이 되었다. 한편 을숙도에는 2000년에 개장한 롤러스케이트장이 있다. 약 3000여 평에 달하는 부지에서 롤러스케이트와 인라인스케이트를 즐길 수 있다. 한편 을숙도의 강변도로는 봄에는 유채꽃이,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하여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공원이다.
사하구의 중앙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구덕산 강안에 뻗은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낙동강에서 불어 내려온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동쪽에는 시약산이 솟고 남쪽에는 금티산이 솟아 그 줄기가 서쪽으로 나지막한 구릉을 이루어 해풍을 막아주는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어 일찍부터 취락이 발달한 곳이다. 조선시대 이곳에 목장이 있어 목장리라고도 불렸다. 다대진 관하의 목장으로는 괴정동의 목장이 가장 규모가 컸으며 지금의 희망촌(괴정4동)일대를 마꼴, 마하곡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부산부에서 동래군 사하면으로 편입되면서 대티동 일부를 편입하였다. 1942년 부산부에 편입되었으며, 인구증가에 따라 괴정1·2·3·4동으로 분동되었다.
사하구 동남부 감천만에 연한 동이다. 구평동의 본동은 성포, 구서평, 구시평, 구평이라고도 불렸다. 성포는 서평포 동남쪽에 있던 포구로서 과거 포구 뒤쪽에 흙으로 쌓은 토성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은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1970년대 이후 감천만의 개발에 의해 해변이 매립되면서 성터는 사라졌다. 성포를 성개라고도 하였으며, 성개의 북동쪽 바닷가에 서평포가 있었다. 서평진 또는 서평포진은 조선 세종 때까지만 해도 부산첨사영에 소속된 하나의 작은 보성이었으나, 1510년 삼포왜란에 이어 을묘왜란이 있은 후 진관제 개편에 따라 만호영으로 바뀌었다. 구평동 북쪽 지역에는 5일장인 독지장이 열렸는데, 사하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 장림에서 생산된 소금 · 수공업품 등이 거래되었다. 1983년 서구에서 사하구 관할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하구 남부 남해에 연한 동이다. 남쪽에 다대포를 끼고 있다. 어항으로 좋은 조건을 가진 포구라하여 다대진(多大津)이라고도 불렀다. 일본 사료에도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한일교역에서 중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멸치잡이를 하면서 곁들인 민속놀이인 다대포후리소리(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1987년 지정)로 유명하다. 이곳에 있던 다대포첨사영 건물인 객사는(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마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를 드린 곳이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낫개마을 · 새모기마을 · 윤씨내마을 · 홍티마을 등이 있다. 1983년 서구에서 사하구 관할로 바뀌었으며, 다대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하구 동남부 감천만에 연한 동이다. 감천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이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감(甘)은 ‘검’에서 온 것이며, 검은 ‘신(神)’을 의미한다는 설과, 물이 좋아서 감천이라 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감천만은 대포만이라고도 하며, 송도반도와 두송반도 사이의 좁고 긴 만이다. 감내포는 감천만 안쪽에 자리 잡은 포구로서 감천만의 옛 지명이다. 깨끗한 모래와 자갈이 깔려 있는 한적한 해안이었으나, 1962년 부산화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옛 모습은 사라지고, 현재는 부산항의 보조항으로서 현대적인 항만으로 되었다. 1983년 서구에서 사하구 관할이 되었으며 행정동인 감천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하구 남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숲이 우거지고 지형적으로 길게 늘어선 동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안장림 · 바깥장림 · 보덕보(부득포 또는 비득포)의 3개 마을로 구분된다. 바깥장림은 농업을 안장림은 어업을 주업으로 생활하고 있었으며 지금은 주택지구로 바뀌었다. 보덕포는 안장림 서남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로서, 보득포 · 부득포 · 버득포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공업단지로 바뀌었다. 개항 이후 이곳은 김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8·15 광복 이전까지는 일본사람들이 김 양식을 많이 하였고, 이때부터 이곳 주민들의 생활수단이 되었다. 장림김은 바닷물과 강물이 합쳐지는 곳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맛이 독특하지만, 1970년 이후 공업단지가 들어서고 강물이 오염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983년 서구에서 사하구 관할로 바뀌었고 장림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하구 북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엄광산 줄기를 북쪽으로 등지고 맑은 계류를 따라 좁은 골에 형성된 마을이다. 이 지역은 마을의 복판에 연중 맑은 물이 흐르는 사이로 북쪽에 소재한 승학산, 동쪽의 산불량, 남쪽의 독뫼를 바라보는 위치에 놓여있다. ‘산불량(山不良)’ 지명은 산맥의 줄기가 이곳까지 뻗어 와서 아깝게도 끊어져 버렸으므로 못쓸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리 지명에 대해서는 이곳 제석골에 제석단을 쌓고 기우제를 지낸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제석골에 사당을 짓고 여신을 모신 데서 기원하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현재도 이곳에는 제석사가 있어 기우제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곳에 있는 성지는 목장성 · 목마성 · 국마성으로도 부르는 옛 성터이다. 지금의 대치고개에서 시작하여 자연마을인 당리 뒷산까지 약 3㎞로 되어 있으며, 과거 이곳에 국마를 키우던 목장이 있었다. 1983년 서구에서 사하구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하구 서부 낙동강에 연한 동이다. 북쪽에 강한 강바람을 막아주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에는 낙동강이 만입되었던 곳에 간척지가 발달해 마을이 입지하였다. 모래가 많아 어패류가 많이 잡히던 곳이었는데, 1939년 이곳에서 장림까지 제방을 쌓으면서 강의 만입부가 농지로 변했다. 신평은 ‘새로운 평지’라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낙동강 강가를 따라 어업과 농업을 주업으로 하던 이 지역은 1981년부터 한국토지개발공사에서 신평, 장림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대단위 공업단지로 변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동매마을 · 망후마을 · 모래구찌마을 · 배고개마을 · 새마을 · 신평마을 등이 있다. 1983년 서구에서 사하구 관할이 되었으며 행정동인 신평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